Book2018. 3. 24. 18:24

절절함 속에 스며든 아련한 연애 - <연심(戀心)>

 

 

 

- 고은채

 

 

 

 책을 접할 때, 오롯이 작품만을 위해 배경지식은 모조리 차단해버린다. 그러나 <연심>을 보기 전과 보는 중, 너무나 많은 정보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얻게 됐다.

 

 

 우선 작가의 나이를 알게 됐다. 작가는 필자보다도 4살이나 어리다. 고은채 작가가 <연심>의 첫 문장을 쓰게 된 때는 고등학생 때였다. 물론 <연심>은 작가의 첫 작품이었다. 이런 정보를 알게 되니 글을 읽을 때 필연적으로 편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를 먼저 이야기하면 이는 오판 이었다. 작가의 경력과 나이에 상관없이 그의 깊은 통찰과 심연에서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반추하게끔 만들 정도였다.

 

 두 번째는 제목 연심의 뜻. 연심은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스펙 하나 더 쌓아보겠다고 발버둥 칠 때 외웠던 한자다.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마음. 보통 배우자를 여의었을 때 쓰는 단어다. <연심>의 주인공 중 표면적으로 죽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연심이라 제목을 지었을까? 이면적으로 죽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은휘의 남편 재우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대항하는 신문사에서 일하며 독립을 열망하던 재우. 은휘에게 재우는 빛이었다. 그러나 이 빛은 일제에 의해 어둠으로 바뀐다. 재우가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재우는 어둠이 되었고 이면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은휘는 재우에게 변치 않는 사랑으로 감싸준다. 재우를 살려보기 위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하지만 돌아오는 건 거세되어 오는 자신이었다. 결과적으로 은휘 자신도 이전의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래서일까? 재우가 연심을 울부짖으며 떠나가는 모습에 뭉클함을 느꼈고, 재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은휘에게 애틋함을 느꼈다.

 

 세 번째는 이상의 <날개>. 고등학생 때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문학을 배웠고 이상을 만났다. 문학에는 답이 없다. 학창시절의 문학은 답을 강요했다. 그 속에서 이상의 작품은 유달리 빛이 났다.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작품을 흠모하게 되었고 대학교에 와서는 그의 작품을 분석한 문헌들을 읽으며 나름 이상 권위자가 되었다. 고은채 작가는 말했다. ‘박제가 된 천재의 이야기를 듣다가 불현 듯 <연심>을 쓰게 되었다고. 그래서인지 몇몇 시퀀스는 이상의 <날개> 모습이 보였다. 돈을 위해, 남편 재우를 위해 매음을 하는 아내, 아내의 별칭 연심, 아스피린과 아달린, 돋보기로 휴지를 태우는 남편 재우, 그리고 미쯔꼬시 백화점. 작가가 밝혔긴 했다지만 오마주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퀀스가 이상의 느낌이 배어 있었다. 더구나 이 시퀀스들이 극의 흐름을 좌우하는 중요 시퀀스라 느꼈기에 아쉬움은 배가 됐다.

 

 네 번째는 프랑스의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연심>의 얼개는 <여자의 일생>과 유사했다. <연심>의 분위기는 톨스토이의 클리셰 중 하나인 성스러운 창녀의 느낌이 묻어났다. <연심>은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작가의 생각을 스토리텔링으로 꾸며내야 하는 장르다. 아쉽지만 <연심>에서 작가의 생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표절로 비쳐질 수 있는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 이는 작가의 개성과 생각을 선명하고 섬세하게 전달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그렇기에 <연심>에 숨겨진, 전달하고픈 작가 본연의 모습과 메시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작가의 필력은 어마어마했다. 특유의 묘사는 물론이고 인물의 심경변화를 글로 표현하는 능력은 대단했다. 덕분에 절절함 속에 스며든 아련한 연애를 활자로써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기대가 된다. 훗날 고은채 작가가 어떤 소설로 자신의 능력을 발산할지, 그리고 어떻게 성장할지.

 

 

<본 리뷰는 도서출판 답의 서평단으로서 참여한 리뷰입니다.>

Posted by AC_CliFe
Podcast2018. 2. 11. 20:28

쓸남 8화.


쓸모있고 슬기로운 남자들이 찌질해지는 순간.


바로 연애!!


찌질한 남자들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을까요?


더불어 그린의 아슬아슬한 고민까지!


메리와 함께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5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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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7. 9. 17. 22:11

이번 화는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읽은 연애소설!


덕분에 학창시절의 풋풋함과 설렘을 느낄 수 있었네요.


+ 북끄북끄의 연애 이야기 까지!


애청해주세요~~~



http://www.podbbang.com/ch/1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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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9. 29. 20:46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입대 전에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 책을 읽기가 귀찮았다. 책 이란게 굳이 찾아서 읽을 만큼의, 필자의 ‘시간’을 포기하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와보니, 자대에 와보니, 생각은 달라졌다. 주위에 있는 것은 ‘시간’ 뿐 이었다. 사회에선 부족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군대에선 풍족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시간을 어떻게 쓸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책’이었다. 이 답이 나오게 된 경로는 의외로 간단했다. 선임들의 관물대를 살펴보니 누구나 한 권쯤 다 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수동적 독서에만 익숙했다. 책을 고르기가 막막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관심사를 살펴봤다. 고등학생 때, 필자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좋아했다. 철학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는 과목이었다. 이번엔 더 깊게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 이후로 관심사가 줄줄이 나왔다. 조금 더 현대적인 책이었으면 좋겠고, 위트 있는 책 이었으면 좋겠고, 인문학에 대한 갈증도 있었으므로 인문학 관련 소재의 책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필자의 관심을 종합해 봤을 때 딱 맞는 작가가 있었다. 그 작가는 바로 알랭 드 보통 이었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알랭 드 보통의 매력은 공감유도 능력이다. 책을 읽을 때 마다 감탄할 정도다. 필자의 일기장을 보는 듯 한 느낌이랄까? 이 능력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3저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 중 특히 이 작품,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 작품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는 반대의 시점이다. 여자 주인공인 엘리스의 관점, 즉 여자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남자인 필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였다. 궁금점 또한 쏟아졌다. 연애, 사랑에 있어서 여자가 느끼는 남자란? 이 상황에서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등과 같은 흔한 궁금점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아니 엘리스의 배경을 설명하는 첫 챕터부터 ‘엘리스 = 필자’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상대적으로 자존감이 없는 모습,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습 등. 필자가 책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덕분에 필자가 에릭과 연애, 사랑하는 상황으로 여기고 엄청난 몰입감과 함께 이 책과 함께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첫째는 “사랑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이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수많은 부부들이 탄생했을까? 부부란 결혼한 사이를 뜻한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법적으로 인연을 맺는 의식이다. 즉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들을 만나서 결혼을 했냐는 것 이다. 이 질문의 답을 알랭 드 보통이 해줬다.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했기에 결혼을 한 것이다. 모순적인 말 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순 속에 공감이 피어났다. 인간들의 근원적 감정인 ‘외로움’. 이 외로움의 특별한 치유제, 사랑.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나눈 대상을 갈구하게 됐고, 이 사랑이 발전해 연애, 그리고 결혼이 된 것이다. 



  이 결론을 얻고, 돈오를 얻은 마냥 필자는 속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 필자의 여친도 사랑을 사랑해서 만나고 있는 것 인가?"

 


 두 번째 인상 깊었던 것은 이상형의 변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상형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그때의 자신의 니즈가 다르고, 욕구가 다르고, 이상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전 애인이 새로운 이상형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연인들이 결별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성격차이’ 일 것이다. 성격차이. 상호간에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이상형은 저절로 자신의 성격에 맞춘 사람으로 변할 것 이다. 그 전 애인과는 다른 성향의 이상형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엘리스의 이상형 변천을 표로 나타낸 부분이 있었다. 이를 보니 사람들의 이상형 변화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예전 평론에서 밝혔다시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필자에게 굉장한 공감을 안겨줬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책도 거의 5페이지에 가까운 필사 분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보다 더 훌륭한 책 이라 생각한다. 공감을 넘어 일종의 ‘선각’을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 여친, 연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많은 것을 숙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9. 23. 12:39

노팅힐

 


- 로저 미첼


 

“명작의 품격”

 


 어렵고도 어려운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토록 잘 표현한 영화가 있을까? 이 영화를 이제야 본 필자가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필자는 영화의 스토리에 있어서 필자만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왔다. 영화의 뿌리는 스토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토리 중에서도 특히 현실성, 개연성을 중시 여겼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해보면 노팅힐 스토리는 형편없다고 평할 수 있었다.

 


 노팅힐의 주 클리셰, 탑 여배우와 평범한 여행서점 주인의 로맨스. 즉 신데렐라 ‘맨’ 클리셰이다. 이 클리셰는 신선했다. 우리 주위에는 항상 신데렐라 클리셰만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함은 곧 비현실적을 뜻한다. 우리네 현실에서 접해보지 못했기에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씬을 통해 설명해보겠다. 탑 여배우가 평범한 여행서점 주인에게 만난 지 10분도 안 되어 볼 키스를 하는 게 비현실적 이었고, 이 둘이 함께 길거리를 노다니는데 그 누구도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개연성도 많이 떨어졌다. 특히 감정의 개연성이 안타까웠다. 사랑싸움에 있어서 사건의 개연성과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는 얼추 들어맞았다. 하지만 싸움의 결과로 인해 나타나는 감정이 다시 사랑의 감정으로 진화할 때는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논리가 계속됐다.

 


 이렇듯 노팅힐의 스토리는 허점이 많았다. 그러나 노팅힐의 스토리는 극찬받을만 하다. 그것 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절대성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를 집약한 씬이 노팅힐의 Climax 기자회견 씬이었다. 그리고 줄리아 로버츠의 한 마디.

 


“Indefinitely”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어서 비현실성은 당연한 것 이었다. 비개연성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면 다 용서할 수 있었다. 단지 사랑에 몸을 맡기면 저절로 뒤따라오는 사랑의 본질, 사랑의 절대성이었다. 사랑 그 자체를 절묘하게, 극적으로 표현한 스토리가 바로 노팅힐 이었다.

 


 그 외 다른 요소들도 노팅힐의 ‘명작’化에 큰 기여를 했다.

 


 휴 그랜트의 연기는 ‘노팅힐’스러웠다. 영국 런던의 작은 도시 노팅힐. 노팅힐스러운 꾸밈없고 담백하고 소박한 연기를 선보였다. 줄리아 로버츠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기를 보여줬다. 자신이 탑 여배우라 그런가? 줄리아 로버츠가 안나였고 안나가 줄리아 로버츠였다. 더불어 그녀의 미소는 노팅힐이라는 영화 전체를 황홀하게 만들어 줬다.

 


 영상 또한 아름다웠다. 영화의 배경인 노팅힐 전면을 풀 샷으로 잡는 첫 씬부터, 시간의 흐름을 담은 휴 그랜트의 롱테이크를 지나 공원 벤치에서 사랑을 나누는 줄리아 로버츠 - 휴 그랜트를 담은 마지막 씬까지. ‘노팅힐’ 이라는 배경과 조화를 이룬 예쁜 영상들이었다.


 

혹자는 말했다.


 

 “자고로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세월의 무게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명작이라 인정받을 수 있다.”

 


 1999년에 만들어진 노팅힐. 1994년에 태어난 필자. 99년의 노팅힐에 큰 울림을 받은 94년에 태어난 필자. 이 정도면 노팅힐을 충분히 명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를 이제야 접한 필자 자신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니,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라도 봐서 다행인 ‘명작’ 노팅힐이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4. 16:11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혹자들은 말한다. "책은 한 번 읽는다고 읽은 게 아니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 요즘같이 책 안 읽는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책 한 번 읽기도 벅찬데 두 번 읽으라고? 책을 한 번 더 읽는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지니며 살아온 필자였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혹자들의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을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다.

 


 필자는 이 책을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전에 처음 접했다. 독서토론 동아리 회장에게 ‘알랭 드 보통’ 이라는 작가를 추천받았다. 더불어 이 책도 추천받았다. 그래서 읽게 됐다. 그 때도 이 책은 분명 흥미로웠다. 사랑에 알랭 드 보통이 더해지니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가슴속에 큰 울림이 느껴지지 못했다. 재미는 있지만 가벼운 느낌? 그렇게 이 책은 필자의 기억에서 차츰 사라져 갔다.

 


 지난주, 미국에 있는 여친과 통화를 했다. 군대에 있는 필자. 미국에 있는 여친. 이러한 특수한 환경 때문인가? 항상 전화통화를 하고 나면 공허함만 남는다. 그 날은 더 심했다.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도서관 컨테이너로 향했다. 그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와 여친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서로 엇갈려있는, 어찌 보면 이상한 관계인데! 이러한 의문을 품으며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이 책의 소재는 ‘나’와 ‘클로이’의 사랑 이야기다. ‘나’와 클로이의 사랑의 시작부터 끝을 그린다. 사실 알랭 드 보통이 선택한 이 소재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다. 한 커플의 시초와 종말을 담은 스토리. 그간 많은 사랑 관련 책들이 다룬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들에는 또 다른 문제점도 존재했다. 바로 추상의 구체화다. 사랑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활자라는 구체적 언어로 표현 하는 것 이다. 대부분의 사랑 서적은 추상의 구체화에 실패했다. 현실의 사랑과 언어의 사랑에서 괴리감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즉 공감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알랭 드 보통. Dr. 러브였다. Dr. 러브는 알랭 드 보통의 별명이다.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적확하게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별명을 얻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필자의 머릿속엔 이 별명이 다시 한 번 상기됐다. 과연 Dr. 러브였다. 위에서 언급한 두 문제점을 완벽히 상쇄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소재 사랑은 굉장히 진부한 소재다. 독자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예상이나 했던 것 일까?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철학’이라는 소스를 가미했다. 그러니 진부함이 새로움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사랑을 위해 많은 철학과 함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했고, 비트겐슈타인과 함께했다. 마르크스도 함께했다. 뿐만 아니라 파스칼, 스탕달, 예수 등 역사적 인물들도 동행했다. 이들의 철학과 사상을 개별적으로 접하면 지루하고 딱딱하다. 그러나 사랑, 알랭 드 보통과 집합적으로 만나니 흥미로웠다 자연스러웠다.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녹여내는 알랭 드 보통의 능력이 드러난 책 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추상의 구체화에 성공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유쾌하고 위트 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 일까? 미친 듯 한 통찰력과 공감유도 능력이었다.

 


 사랑의 발단. 사랑하는 대상의 ‘이상화(理想化)’,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면의 의미’. 사랑의 전개. 왜 나 따위를 사랑하는가? ‘마르크스주의’. 서로를 공유하는 우리, 그것의 확산 ‘친밀성’. 사랑의 위기. 익숙함에 취할 무렵 ‘마음의 동요’.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사이 ‘행복에 대한 두려움’. 피어나는 질투심과 이기주의 ‘낭만적 테러리즘’. 사랑의 절정. 왜 나인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심리적 운명론’. 죽음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사랑의 불멸성 증명 ‘자살’. 사랑의 결말. 왜 우리는 그냥 사랑할 수 없는 것 일까? 불합리하고도 불가피한 사랑 ‘사랑의 교훈’.

 


 극단적인 사례가 종종 있어 아쉽긴 했지만 사랑, 그 일련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현실적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죽하면 필자와 현 여친과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하며 읽었을 정도다.

 


 필자는 공감가는 구절이 있을 때, 연필로 줄을 치며 읽는 버릇이 있다. 이를 다시 필사까지 해 본다. 보통 책은 필사를 하면 2-3페이지 정도 나온다. 과거의 필사노트를 펼쳐보니 처음 접했을 때의 이 책도 2페이지 필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읽었을 때의 필사는 달랐다. 5페이지 정도 나왔다. 어떤 챕터를 읽을 때는 그 챕터의 모든 구절을 밑줄 긋고 싶다는 욕망까지 솟구쳤을 정도였다.

 


 그간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역시 그는 사랑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나는 작가였다. Dr. LOVE. 그의 다음 사랑 이야기를 고대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ps.  예전의 글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30. 19:1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소설가) 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의 장르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어떤 이는 성에 관한 이야기라 평했다. 다른 이는 정치, 사회적 장르라 했다. 또 다른 이는 철학서, 신학 서라고 했다. 이러한 장르 논쟁을 보고 광고인 박웅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무한한 우주가 담겨있다.”

 


 그만큼 다양하고 수많은 장르를 품고 있는 책 이란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장르는 ‘연애소설’이라 단언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선 극을 이끌어가는 두 개의 러브라인이 있다. 토마스-테레사의 러브라인, 사비나-프란츠의 러브라인이다.

 


 밀란 쿤데라는 사랑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메타포가 하나만 있어도 생겨날 수 있다.”

 


 토마스는 프라하의 풍족한 의사였다. 풍족한 사랑꾼이기도 했다. 그것도 가볍고 육체적인. 의사라는 직업에, 부유한 배경, 얼핏 보면 무거운, 영혼의 세계에 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랑이 있어서 육체적 관계만 추구하고, 그러다보니 자신은 점점 가벼워졌다. 테레사는 시골의 부족한 웨이트리스였다. 그녀는 시골, 부족함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배경이 싫었다. 그녀 주위에는 경박한 엄마와 천박한 시골사람 뿐 이었다. 가볍고 육체적이었다. 그녀는 하루 발이 이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거움과 영혼의 세계를 꿈꿨기 때문이다. 그 때 자신의 이상처럼 보이는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연락처를 건네줬다. 토마스가 시골에 출장 왕진을 갔다가 식당에서 테레사를 만났고, 늘 그렇듯 육체적 사랑을 꿈꾸며 연락처를 건넨 것 이다. 프라하로 오면 연락하라는 말 또한 덧붙였다. 테레사는 이런 토마스의 행동에 의미부여를 했다. 그 연락처를 영혼의 세계로의 초대로 인식 한 것이다. 테레사는 ‘안나 카레리나’ 한 권과 자기 몸만 한 트렁크를 가지고 토마스의 집으로 찾아갔다. 토마스는 테레사를 동정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갈 곳 없는, 자기 몸만 한 트렁크를 지닌 그녀. 그는 연민을 느꼈다. 이 ‘연민’이라는 메타포가 ‘사랑’ 이라는 감정으로 진화하는 순간이다. 이를 계기로 둘은 사랑하기 시작했다.

 


 사비나는 무거운 배경의 소유자다. 그 당시 소련 침공으로 인해 공산주의 化 된 체코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어딜 가나 반체제 인사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화가라는 직업도 그녀를 오해하게 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하지만 개별적인 테레사는 달랐다. 그녀는 모든 체제를 부정 혹은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둘러싼 무거움과 달리, 토마스처럼 성 관계를 맺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가볍고 육체적인 사람이었다. 즉 무거운 배경을 증오하고 가벼움과 육체적 세계를 추구한 사비나였다. 프란츠는 이 사비나를 ‘경외’라는 메타포를 바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엄친아’ 프란츠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아왔다. 유명한 수학자로서 20대의 나이에 교수가 되는 등 굴곡이 없는 삶 이었다. 고난이 없던 삶이어서 그런지 사랑에 있어서도 영혼의 사랑, 무거운 사랑을 원했다. 그랬던 탓 일까? 변화, 혁명, 투쟁에 갈증을 느꼈다. 그 때 사비나아 그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산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존경심, 나아가 경외심을 갖는다. ‘경외’라는 메타포가 이들의 사랑을 탄생시켰다.

 


 시작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두 커플의 끝은 판이했다. 다시 토마스-테레사 이야기를 해보겠다. 토마스는 가벼운 사람이었다. 영혼의 세계가 아닌 육체의 세계의 주민이었던 것 이다. 테레사를 만나는 중에도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성관계를 맺었다. 오죽하면 그의 머리에서 다른 여자의 음부 냄새가 났을까? 토마스가 영혼의 세계 사람이라는 테레사의 판단이 틀렸던 것 이다. 이로 인해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토마스는 테레사를 잊지 못했다. 다툼으로 인해 떨어져 있던 상황에도, 항상 그녀를 생각했다. 이 생각은 점점 깊어져갔다. 결국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토마스는 자기 자신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의사에서 시골 정비사로,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육체의 세계에서 영혼의 세계로 ‘이동’했다. 이러한 토마스의 ‘이동’으로, 혹은 그의 ‘희생’으로 둘의 사랑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사비나와 프란츠에게도 가치관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비나 또한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육체적인 사람이었다. 사비나의 가벼움은 ‘배반’이란 단어로 상징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키치를 혐오한 그녀는 키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국, 가족, 사랑을 배반한다. 모든 걸 가볍게 여기는 그녀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런 사비나에게 프란츠는 자신의 무거움을 내세우며 다가왔다. 그의 부인 아리클로드와 이혼까지 하며 사비나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자신을 무거움으로 이동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기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토마스ㅡ와 달리 선택의 기로에서 가벼움을 택했고 육체적 세계를 택했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이동’이 아닌 ‘유지’를 택한 것 이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 사랑은 비극적 결말은 맺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두 사랑 속에서 역사와 정치, 신학과 철학, 성과 사랑을 다룬다. 책의 시점 또한 주인공들 중 한명에서부터 전지적 시점까지 다룬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는, 까면 깔수록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양파 같은 책이다. 그래서 어렵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단 한 가지만 기억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토마스처럼 ‘이동’과 ‘희생’을 하며 사랑할 것인가, 사비나처럼 ‘유지’를 하면서 사랑할 것 인가? 참고로 필자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것 같다!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8. 28. 15:0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필자는 일본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일본영화들은 대부분이 너무나 단순하고 뻔뻔한 플롯들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중후반까지는 필자의 냉소적인 이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

 

 

 러닝타임 한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대략 20분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화면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분명 영화자체는 매력적이었다. 장애인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조금은 유쾌하게 조금은 진지하게 조화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 또한 영화 곳곳에 나오는 대사들. 그리고 복선들. 이누도 잇신의 치밀한 연출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게 다였다. 그저 담백해 보이는 척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개봉 할 정도의 가치는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마지막 10분이 이 모든 편견을 다 부셔버렸다. 동거하던 조제와의 담담하고, 덤덤한 이별.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만나는 전 여자친구.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버리는 울음. 이 장면들이 있기 전, 자신들도 자연스럽게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들 까지.

 


 필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집까지 지하철이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굳이 버스를 타 30분 넘게 가는 버릇이 있다. 그 시간 동안 바둑을 끝낸 갓세돌 마냥 영화를 복기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복기 전, 즉 영화를 보는 중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주제를 단지 표면적인 ‘장애인과의 특별한 사랑’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 모든 것이 집약되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마지막 10분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흔하디흔한 ‘사랑의 변화’가 주제였다. 장애인과 정상인의 사랑이 아닌, 그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담백한’ 영화였다.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 변화한다.' 츠네오와 조제 또한 서로 사랑을 하며 변화했다. 필자는 이 변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조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랑을 하기 전, 조제는 자신을 숨기기 일쑤였다. 유모차에 자신을 은폐엄폐하고, 집 안에서도 조그만 옷장에 자신을 숨겼다. 하지만 츠네오와 만나고 사랑을 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호랑이와의 만남'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봐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좋아하는 남자, 즉 사랑을 통해 장애라는 허물을 벗고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조제의 변화는 호랑이를 통해 빚어지는 외면의 변화 뿐 만이 아니다. 츠네오와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을 시간 1년. 1년 후의 여행에서, 물고기가 함께하는 여관방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사랑을 하기 전, 조제는 해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답답하고 고독한 공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츠네오와의 1년이라는 사랑의 시간을 거치며 그녀는 내면에서 질곡의 변화를 느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혹여나 사랑을 찾게 된다면 다시 한 번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은 역시 마지막 10분! 조제는 1년 전과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게 전동 휠체어로 세상을 누비며, 정리한 집에서 일상을 맞이하고, 또 다시 의자에서 다이빙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를 보면서 느낀 점. 감독의 역량이 이렇게 두드러진 영화가 또 있을까? 그리고 ‘장애’라는 다소 자극적인 수단으로 ‘사랑’이라는 담백한 목적을 이루는 이토록 역설적인 영화가 또 있을까? 재개봉 할 가치가 있는,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었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