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2017. 11. 8. 20:50

음악방송에서 일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아이돌이 컴백을 한다고 하면 항상 뮤직비디오를 챙겨보네요.


그러다 뮤직비디오 속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가장 잘 나가는 두 명의 뮤직비디오 디렉터, 디지페디와 룸펜스


그들의 작품을 분석해봤습니다!







http://www.heralddesign.co.kr/read/view.php?no=558&btype=trend

Posted by AC_CliFe
Design2017. 6. 3. 18:27

여름이 다가 옵니다.


타투의 계절이라 할 수 있죠.


타투 하고싶습니다.


그런데 쫄보라서 못하겠습니다.


바로 후회할 것 같습니다 ...... ㅠㅠㅠㅠㅠ


글을 통해서 간접경험 해봤네요 ㅎㅎ



http://www.heralddesign.co.kr/read/view.php?no=419&btype=trend

Posted by AC_CliFe
Design2017. 4. 18. 20:49

예술로 승화된 낙서 - 그래피티 아트

 

 


 

 거리를 거닐다보면 언젠가부터 낙서들이 벽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관에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무의미한 욕설과 함께 날카롭게 쓰인 거친 말들. ‘그래피티라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저러한 낙서들은 예술이 아닌 반항의 흔적으로만 여긴 나였다. 하지만 군 복무 중 이런 관점을 바꿔준 일이 일어났다. 황폐하기만 하던 군부대의 벽면을 벽화 봉사자들이 나서서 멋있게 꾸며준 것이었다. 그 후로부터 나는 그래피티를 그래피티 아트로 인식하게 됐다. 오늘은 이 그래피티 아트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1. 그래피티 아트, 너는 누구냐

 


 유럽에선 이미 예술로서 인정받은 그래피티 아트. 우리나라에선 아직 낯설기만 하다. 우선 그래피티 아트의 어원부터 알아가 보도록 하자. 그래피티 (Graffiti) 긁어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어 ‘Graffito'와 그리스어 'sgraffito'에서 유래된 말 이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긁어서 새기는, 즉 뿌릴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만드는 낙서나 그림을 나타내는 말 이다. 그래피티 아트의 기원은 그 어떤 예술보다 오래됐다. 우리가 미술, 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동굴의 벽화나 유적에 새겨진 것들. 그 모든 게 그래피티 아트라 할 수 있다.


 이 그래피티 아트가 본격적으로 예술로 주목받기 시작하게 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사이 톰블리 (Cy Twombly)는 무언가를 뿌려서 만드는 그림과 낙서에 관심을 가졌고 같은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은 물감을 끼얹고 튀기고 흘리는 액션 페인팅을 통해 그래피티 아트의 발전을 알렸다.

 



2. 그래피티 아트, 현대 예술을 만나다

 


 톰블리와 폴록이 그래피티 아트의 발전에 방아쇠를 당겼다면 이를 극대화 시킨 아티스트는 장 미숼 바스키아 (Jean Michel Basquiat)와 키스 해링 (Keith Harring)이 있다. 장 미쉘 바스키아는 미국의 전문 낙서화가로 인종주의, 흑인영웅, 자전적 이야기 등을 자신의 그림 소재로 다루면서 예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장 미쉘 바스키아는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을 그림에 담아내면서 그래피티를 지저분하고 서투른 낙서가 아닌 진정한 예술로서 승화시킨 화가다. 키스 해링 또한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다. 그는 부정적인 낙인이 박힌 그래피티를 새로운 형식으로 창조한 아티스트로 평가 받는다. 장 미쉘 바스키아가 에너지틱한 그림을 그렸다면 키스 해링은 간결하고 위트 있는 그래피티를 선보이며 또 다른 그래피티 아트의 매력을 안겨줬다.




3. 그래피티 아트,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보수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 우리나라 예술계. 그렇기에 그래피티 아트에 대한 시선은 더더욱 곱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시선에 도전장을 내민 아티스트가 있었다. 로얄독 (Royal Dog) 이라는 닉네임으로 세상에 자신을 알린 아티스트, 심찬양이다.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우리나라의 그래피티 아트를 대표해 LA, 뉴욕 벽면에 한국적 그래피티를 새긴 인물인 심찬양. 한국에선 그래피티 아트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미국에서 그래피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는 한복 입은 흑인 소녀등의 한국미와 인종 문제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그래피티로 까다로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그의 노력 덕분일까? 우리나라에도 그래피티를 하나의 예술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져 이제는 주변 곳곳에서도 그래피티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래피티. 폐쇄적인 환경 탓에 예술로 인정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음지에 있는 주제를 양지로 꺼내어 색다르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사회를 건드리는, 그 어떤 예술보다 뚜렷한 예술이 됐다. 요즘에는 그래피티 아트를 주제로 하는 전시회나 축제도 많으니 독자들도 함께 즐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과 함께 보시려면 밑 링크로 가주세요.


--- http://www.heralddesign.co.kr/read/view.php?no=352&btype=trend

Posted by AC_CliFe
Design2017. 4. 7. 16:06

디노 토믹과 함께 하는 솔트아트의 세계

 

 


 

 

 ‘소금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부분 식()과 관련된 답이 떠오를 것이다. 나도 그랬다. 소금은 우리의 식생활에 필요한 필수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신기한 소식을 접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SNS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중 눈에 띠는 사진이 있었다. 가루로 만들어진 그림들이었다. 예술에 일자무식인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그림들이었다. 샌드아트와 비슷해 보이는데 어떻게 바탕이 하얀색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 사진을 클릭해 관련 정보를 봤다. 낯익은 단어가 보였다. Salt art. 솔트아트? 솔트라면 소금? 내가 알던 소금으로 저런 멋들어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솔트아트. 이 솔트아트를 이끄는 작가는 오늘 소개할 디노 토믹(Dino Tomic) 이었다.

 

 

 디노 토믹은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미술교사이자 타투 아티스트였다. 과거 그는 촉망받는 화가였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손목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손목의 고통이 그를 뒤덮었다. 결국 그는 다른 방법의 예술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방법으로. 많은 방법을 고안하다 그는 소금을 발견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소금을 흩뿌리면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자신만의 솔트아트 창조에 성공했다. 우선 검은 천을 자신의 작업장에 펼친다. 그 위에 미리 준비한 소금이 들어간 플라스틱 통을 가져와 소금을 뿌린다. 소금을 뿌리고 손가락으로 다듬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작품의 형체가 보이면서 작품을 완성시킨다. 글로 쓰면 굉장히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디노 토믹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긴 영상을 보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그 속에 숨겨진 그만의 헌신과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솔트아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놀라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디노 토믹은 솔트아트라는 예술을 통해 하나의 작품이 아닌 두 개의 작품을 만들고 있던 것이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솔트아트는 검은색 배경에 하얀색 바탕을 선택한다. 디노 토믹은 완성된 작품에 네거티브 효과를 넣어보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효과를 준 그의 작품은 기존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줬다. 한 작품을 통해 상반된 매력을 주는 디노 토믹만의 솔트아트였다.

 



 

 디노 토믹은 손목 통증으로 인해 자칫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하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한 번 더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디노 토믹에게도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소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만의 예술 세계로 향하는 발판이다. 소금 예술이라는 예술분야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더 기대되는 노력하는 예술가, 솔트아트의 선구자 디노 토믹이었다.




-- 사진과 함께 보시려면 이 링크로 들어가주세요!

http://www.heralddesign.co.kr/read/view.php?no=328&btype=trend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6. 19:51

젊은 목수들 : 일본 (우리 시대의 새로운 가구 제작 스튜디오를 찾아서)

 

 

취재 : 하기하라 켄타로, 오타 아야

 

사진 : 나게레 사토시

 

일러스트 : 오가와 나호

 

번역 : 임윤정

 

 

1.

 필자에게 집이란 주거의 개념일 뿐 예술의 개념은 될 수 없었다. 직·간접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탓일까? 집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그저 잘 수 있는 침대만 있으면 됐고, 공부할 수 있는 책상만 있으면 됐고, 무언가를 넣어 둘 수납장만 있으면 됐다. 단지 ‘존재’ 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은 한 봉사활동을 계기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2.

 2년 전, 올 여름만큼이나 뜨거웠던 2014년의 여름. 보름간의 집수리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천성적으로 몸 쓰는 것을 싫어하는 필자. 당연히 집수리 하는 봉사자가 아닌, 그들의 땀과 열정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VJ 로 참여했다. 집수리 팀 한 조를 따라가 필자가 원하는 그림을 따고 편집하는 자유로운 환경의 봉사였다. 하지만 원하는 영상을 다 찍어도 집수리는 끝나지 않았다. 인력은 부족해 보였다. 반 강제적으로 ‘집수리’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도배를 위한 벽지를 자르고, 풀을 만들고, 빗질을 했다. 처음에는 힘들기만 했다. 필자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벽지를 붙여가면서 집이 변해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죽어있던 집이 생기를 띠는 것 같았다. 우울했던 집이 활기를 되찾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집도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3.

 집은 예술이다. 젊은 목수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가구를 제작할 때 실용성은 물론 디자인까지 고려하면서 집을 예술의 집합체로 구성했다. 이 경향은 일본의 젊은 목수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지리적 환경은 가구에 내구성과 실용성을 요구했고,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가구에 섬세함과 기능성을 요구했다. 그들은 가구에 철학을 담아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다. 그리고 집을 예술로 이끌었다.

 

 

4.

 일본의 젊은 목수들의 가구들은 달랐다. 아오키 가구 아틀리에의 아오키 타카시는 실용성을 위해 합판의 가구를 추구했다. 라 포르제롱의 오카모토 유키는 섬세함을 위해 장식용 가구를 만들었다. 시즈카 스튜디오의 이와세 카즈사에는 심미성을 위해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목재 가구를 만들었다.

 

 

5.

 하지만 그들의 마음가짐은 똑같았다.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 만들고 싶다는 갈망에 목재를 가공하기 시작한 목수들은 가구에 자신들의 인생을 담았고 철학을 담았다. 그리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가구에 대해 무지한 필자지만 일본의 젊은 목수들 22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들의 가구를 느끼면서 집이 예술이 되어가는 과정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6.

 사실 이 책은 목재 재질이나 가구 양식 등 실용적 정보를 주지만 그 깊이는 가구 전체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목수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구의 ‘내면’에 주목한 책이었다. 그렇기에 차별화되고 색다른 가치를 지닌 ‘예술’ 책이었다. 가구에 인생이, 철학이 그리고 예술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책 하기하라 켄타로, 오타 아야의 <젊은 목수들 : 일본> 이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3. 11:27

달과 6펜스

 

 

 ‘일상’은 우리네 삶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장치다.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만인의 투쟁을 바로잡아주고, 정상의 지침을 마련해 준 것이 지금의 일상이다. 일상은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술 혼에 인생을 맡긴, 예술, 아름다움이라는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힌 예술가들이었다.

 


 美(미)에 취해 오로지 예술을 추구하며, 예술 혼을 불태우며 살았던 예술가들. 예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은 일상이라는 질서에서 벗어나 탐미적 광기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 일까. 이러한 의문이 한창 달아오를 때 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두 분류로 정의할 수 있다. 달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영롱하게 빛나는 달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비춘다. 영혼을 매혹하면서 우리의 주관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 자극에 반응하여 자신만의 열정과 광기를 극적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이 달의 세계 사람들이다.

 


 6펜스도 빛난다. 조금은 거친 빛을 내는 6펜스는 우리의 육체만을 비춘다. 육체를 비추면서 우리를 이끈다. 세속적인, 그리고 타성에 젖은 일상으로. 세속의 애환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6펜스 세계의 사람들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달의 세계 사람이다. 아니. 6펜스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온 이주민이다. 런던의 증권 브로커로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온 그.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일상을 버리고 낯선 타지, 파리로 떠난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달의 세계로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 후 탐미적 광기에 빠져든 채, 영혼과 본능의 세계에 빠져든 채 오로지 예술, 그림만을 위한 삶을 영위한다.

 


 문득 서두에서 밝힌 필자의 의문이 다시 생각났다. 무엇이 스트릭랜드를 예술가들의 生(생), 그리고 달의 세계로 초대한 것일까? 스트릭랜드의 궁극적 목표, 열반 혹은 진리,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일상이 지배하는 6펜스 세계에는 속물적 근성이 만연해 있었다. 사람들을 나태와 권태로 찌들게 하는 안락이 팽배해 있었다. 사람은 결국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일상에 처절하게 매몰됐다. 세속적 화가 스트로브, 속물근성의 스트릭랜드 부인, 히스테리적 여자 블란치 등이 6펜스 세계를 대변한다. 스트릭랜드는 일상에 찌든 6펜스 세계 주민들에게 경멸과 냉소를 남긴 채 달의 세계로의 초대를 수락했다.


 

 그렇다면 과연 스트릭랜드는 달의 세계에서 자신의 갈망을 누릴 수 있었을까? 스트릭랜드는 그림이라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이상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적 열망을 극에 다다랐다. 문둥병이라는 육체적 고난도 그의 갈망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갈망, 그리고 열반, 진리, 자유는 타히티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의 갈망은 타히티 본가에 그린 그림, 원시적 낙원의 세계로 형상화 됐다. 그리고 난 후, 달의 세계에서의 그의 여정을 마감했다.

 


 <달과 6펜스>를 완독하니 스트릭랜드와 필자가 미묘하게 닮은 부분이 있었다. 필자 또한 스트릭랜드처럼 6펜스 세계를 혐오하는 부류였다. 6펜스 세계에 만연해있는 특유의 세속적 분위기에 거부감이 들었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해체시키는 문명에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필자를 염세주의로 인도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와 필자에겐 결정적 차이가 존재했다. ‘달의 세계’로의 이주다. 스트릭랜드는 과감했다. 필자는 두려웠다. 두려움으로 인해 일상과의 타협을 마주했다. 그리고 일상에 매몰됐다. 이 미세한 차이가 스트릭랜드를 위인으로 만들었고 필자를 범인으로 만들었다.

 


 혹자들은 <달과 6펜스>를 광적인 예술가들에 대한 옹호만 할 뿐 다른 주제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가치한 작품이라 혹평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속에 살아가던 독자들에게 낭만적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자유에 대한 갈망을 꿈틀거리게 한 것만으로도 <달과 6펜스>의 가치는 충분했다. 인간 근원의 욕망을 건드리는 위험하고도 낭만적인 작품,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였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