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016. 11. 26. 20:39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이 책의 제목처럼 오늘날은 ‘뉴스의 시대’다. 사회에 뉴스의 양 자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뉴스 자체의 질에 대해서도 관심이 증폭됐다. 이 뉴스는 어떤 성향을 띠고 있는지, 어떤 논조로 기사를 작성하는지, 어 떤 소식을 주로 다루는 지 등에 대한 관심이다. 이는 곧 대중들의 뉴스에 대한 맹목적 수용이 아닌 선별적 수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도 뉴스에 대한 선별적 수용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자신만의 지침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뉴스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라, 추측으로 점철된 기자의 관점을 조심해라 등 기존의 관련 책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지침들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책을 조금 더 정독하며 살펴보니 알랭 드 보통은 뉴스가 갖춰야 할 성격 ‘한 가지’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한 가지는 뉴스가 다루는 주제에 대한 ‘맥락’이었다.


 

 정치뉴스 中 사건이 전개되어 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은 것.


 해외뉴스 中 우리가 특정지역에서 일상적으로 통하는 게 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비일상적 상태를 측정하거나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


 경제뉴스 中 비즈니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로지 경제 용어로만 작성하거나, 회사 전 체를 +1.20 이라고 요약하거나 하는 행위들은 한계가 명확한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맥락’에 대한 지적은 일견 공감이 됐다. 오늘날의 뉴스 구조를 살펴보면, 사건의 결과에 많은 비중이 쏠려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나 원인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거나 극소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뉴스의 불친절은 뉴스의 수용자, 대중들이 사건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하게 하고, 사건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맥락’. 뉴스를 소비 및 수용하는 대중들의 입장에선 중요한 게 맞다. 그들 또한 뉴스의 본질, 그리고 깊은 이해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스에 맥락을 담아낸다는 관점은 안타깝게도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뉴스라는 매체도 결국 ‘돈’이라는 상업적 요인과 결부되어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제작하는 여러 기업들은 다수의 고객들을 유치하길 원한다. 그로인한 다량의 광고가 많이 붙기를 원한다. 그들도 이윤추구를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고객, 다량의 광고를 위해선 어찌해야겠는가? 자신들이 제작하는 뉴스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이끌어 낼 뉴스를 제작해야 한다.

이런 뉴스는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맥락화된 뉴스가 아닌, 결과만 간단하게 압축한 뉴스다. 실제로 어떤 사건의 결과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뉴스가 사건의 배경, 원인까지 설명한, 즉 맥락화된 뉴스보다 더 높은 트래픽을 기록하고 더 많은 가입자를 이끌었다. 이런 사실을 안 기업들은 너도나도, 당연하게도, ‘결과’만을 위한 뉴스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적인 누스의 선별적 수용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두 종류의 뉴스 읽기를 추천한다. 뉴스는 각 회사의 특성에 따라 다른 논조를 띠기 마련이다. 상반되는 논조를 지닌 두 뉴스를 선택해 그 사이에 존립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는 것 이다. 맥락화된 뉴스가 불가능한 오늘날에, 두 종류의 뉴스 읽기는 대중들의 정보 선별적 수용을 위한 차선책으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것 이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10. 1. 18:59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The Course of Love’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여친이 보낸 메시지의 전문이다. 사랑의 과정? 오랫동안 사귀어온 관계. 그렇기에 지극히 쿨한 관계. 이런 관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답장을 보냈다. ‘뭔 x소리?’ 답장이 왔다. ‘The Course of Love' 똑같은 답장이었다. 대화가 진전될 기미가 안보였다. 읽씹했다. 몇 분 후, 여친한테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알랭 드 보통이 새 책을 냈다고 한다. ‘The Course of Love'는 그 책의 제목이었다. 닥터 러브가 새 책을 냈다고? 그것도 소설? 온라인 서점으로 들어가 바로 결재버튼을 눌렀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을 통해 낭만적 연애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마음껏 뽐냈다. 필자는 알랭 드 보통 만의 깊은 통찰에 감탄하며 이 시리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편엔 아쉬운 점도 있었다. 보통의 ‘연애’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 필자가 하고 있는 장기간 연애나 결혼까지 발전한 특별한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The Course of Love’에서 항상 사랑의 초중반에만 통찰한 알랭 드 보통 이었다.

 

 

 하지만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The Course of Love’ 중 사랑의 후반부에 집중한 소설이었다. 즉 그 후의 일상에 관심을 둔, 필자의 기대를 충족시킨 소설이었다. 그래서인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보다 더 흥미롭게 읽었다.

 

 

 언젠가 여친한테 물었다. 결혼이란 현실이 다가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여친은 대답했다. 결혼은 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사랑을 결혼이란 이름에 가둔다고 사랑의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결혼이라는 의식은 우리의 사랑을 더 공고히 다져줄 것이라고. 이상주의자인 그녀였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녀와 상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필자. 곧바로 반문했다. 결혼은 일상의 공유를 뜻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혹은 지금의 연애관계에선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는 보통의 커플이 아니다! 자그마치 8년을 같이 한 커플이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다! 아까도 말했듯이 결론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특별한 커플이기에 결혼을 해도 특별할 것이다! 오글거렸다. 하지만 기특했다. 그리고 설득 당했다. 우리 둘은 결혼해도 타(他) 커플들과는 다른 특별한 부부로 남겠지. 일상이 개입한다 하더라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특별한 커플.

 

 

 이러한 믿음을 되뇌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갈수록 이 믿음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혼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다는 걸 필자와 여친은 모르고 있었다. 집안일이라는 변수, 아이들이라는 변수, 외도라는 변수, 중년의 나이라는 변수 등등. 낭만적 연애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일상’의 변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혼이란 행위는 낭만주의가 아닌 현실주의로 변색되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일상에 매몰되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이 정의한 결혼의 의미가 일견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알랭 드 보통의 결혼에 대한 일상적 통찰은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에서 정점을 찍는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귀가 깔려있어 단 한사람과 사실상 열두 번의 이혼과 재혼을 겪은 라비.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주인공 라비. 그로 인해 보다 성숙해진 라비. 그래서 낭만을 넘어 결혼이란 현실에 순응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라비와 커스틴.

 

 

 책을 읽기 전 되뇌였던 믿음은 이미 가루가 된지 오래였다. 그 자리는 결혼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믿음을 산산조각 낸 알랭 드 보통에 대한 경외 섞인 원망과 함께한 채.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다 읽은 후 다시 한 번 여친한테 물었다. 결혼이란 현실이 다가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여친은 대답했다. ‘The Course of Love... ㅠㅠ.’ 사랑에 대한 집요하고도 능숙한 통찰로 독자를 이래저래 미치게 만드는 이 시대 최고의 일상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이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29. 20:46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입대 전에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 책을 읽기가 귀찮았다. 책 이란게 굳이 찾아서 읽을 만큼의, 필자의 ‘시간’을 포기하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와보니, 자대에 와보니, 생각은 달라졌다. 주위에 있는 것은 ‘시간’ 뿐 이었다. 사회에선 부족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군대에선 풍족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시간을 어떻게 쓸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책’이었다. 이 답이 나오게 된 경로는 의외로 간단했다. 선임들의 관물대를 살펴보니 누구나 한 권쯤 다 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수동적 독서에만 익숙했다. 책을 고르기가 막막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관심사를 살펴봤다. 고등학생 때, 필자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좋아했다. 철학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는 과목이었다. 이번엔 더 깊게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 이후로 관심사가 줄줄이 나왔다. 조금 더 현대적인 책이었으면 좋겠고, 위트 있는 책 이었으면 좋겠고, 인문학에 대한 갈증도 있었으므로 인문학 관련 소재의 책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필자의 관심을 종합해 봤을 때 딱 맞는 작가가 있었다. 그 작가는 바로 알랭 드 보통 이었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알랭 드 보통의 매력은 공감유도 능력이다. 책을 읽을 때 마다 감탄할 정도다. 필자의 일기장을 보는 듯 한 느낌이랄까? 이 능력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3저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 중 특히 이 작품,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 작품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는 반대의 시점이다. 여자 주인공인 엘리스의 관점, 즉 여자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남자인 필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였다. 궁금점 또한 쏟아졌다. 연애, 사랑에 있어서 여자가 느끼는 남자란? 이 상황에서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등과 같은 흔한 궁금점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아니 엘리스의 배경을 설명하는 첫 챕터부터 ‘엘리스 = 필자’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상대적으로 자존감이 없는 모습,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습 등. 필자가 책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덕분에 필자가 에릭과 연애, 사랑하는 상황으로 여기고 엄청난 몰입감과 함께 이 책과 함께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첫째는 “사랑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이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수많은 부부들이 탄생했을까? 부부란 결혼한 사이를 뜻한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법적으로 인연을 맺는 의식이다. 즉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들을 만나서 결혼을 했냐는 것 이다. 이 질문의 답을 알랭 드 보통이 해줬다.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했기에 결혼을 한 것이다. 모순적인 말 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순 속에 공감이 피어났다. 인간들의 근원적 감정인 ‘외로움’. 이 외로움의 특별한 치유제, 사랑.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나눈 대상을 갈구하게 됐고, 이 사랑이 발전해 연애, 그리고 결혼이 된 것이다. 



  이 결론을 얻고, 돈오를 얻은 마냥 필자는 속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 필자의 여친도 사랑을 사랑해서 만나고 있는 것 인가?"

 


 두 번째 인상 깊었던 것은 이상형의 변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상형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그때의 자신의 니즈가 다르고, 욕구가 다르고, 이상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전 애인이 새로운 이상형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연인들이 결별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성격차이’ 일 것이다. 성격차이. 상호간에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이상형은 저절로 자신의 성격에 맞춘 사람으로 변할 것 이다. 그 전 애인과는 다른 성향의 이상형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엘리스의 이상형 변천을 표로 나타낸 부분이 있었다. 이를 보니 사람들의 이상형 변화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예전 평론에서 밝혔다시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필자에게 굉장한 공감을 안겨줬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책도 거의 5페이지에 가까운 필사 분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보다 더 훌륭한 책 이라 생각한다. 공감을 넘어 일종의 ‘선각’을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 여친, 연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많은 것을 숙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4. 16:11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혹자들은 말한다. "책은 한 번 읽는다고 읽은 게 아니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 요즘같이 책 안 읽는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책 한 번 읽기도 벅찬데 두 번 읽으라고? 책을 한 번 더 읽는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지니며 살아온 필자였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혹자들의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을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다.

 


 필자는 이 책을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전에 처음 접했다. 독서토론 동아리 회장에게 ‘알랭 드 보통’ 이라는 작가를 추천받았다. 더불어 이 책도 추천받았다. 그래서 읽게 됐다. 그 때도 이 책은 분명 흥미로웠다. 사랑에 알랭 드 보통이 더해지니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가슴속에 큰 울림이 느껴지지 못했다. 재미는 있지만 가벼운 느낌? 그렇게 이 책은 필자의 기억에서 차츰 사라져 갔다.

 


 지난주, 미국에 있는 여친과 통화를 했다. 군대에 있는 필자. 미국에 있는 여친. 이러한 특수한 환경 때문인가? 항상 전화통화를 하고 나면 공허함만 남는다. 그 날은 더 심했다.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도서관 컨테이너로 향했다. 그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와 여친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서로 엇갈려있는, 어찌 보면 이상한 관계인데! 이러한 의문을 품으며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이 책의 소재는 ‘나’와 ‘클로이’의 사랑 이야기다. ‘나’와 클로이의 사랑의 시작부터 끝을 그린다. 사실 알랭 드 보통이 선택한 이 소재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다. 한 커플의 시초와 종말을 담은 스토리. 그간 많은 사랑 관련 책들이 다룬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들에는 또 다른 문제점도 존재했다. 바로 추상의 구체화다. 사랑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활자라는 구체적 언어로 표현 하는 것 이다. 대부분의 사랑 서적은 추상의 구체화에 실패했다. 현실의 사랑과 언어의 사랑에서 괴리감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즉 공감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알랭 드 보통. Dr. 러브였다. Dr. 러브는 알랭 드 보통의 별명이다.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적확하게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별명을 얻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필자의 머릿속엔 이 별명이 다시 한 번 상기됐다. 과연 Dr. 러브였다. 위에서 언급한 두 문제점을 완벽히 상쇄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소재 사랑은 굉장히 진부한 소재다. 독자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예상이나 했던 것 일까?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철학’이라는 소스를 가미했다. 그러니 진부함이 새로움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사랑을 위해 많은 철학과 함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했고, 비트겐슈타인과 함께했다. 마르크스도 함께했다. 뿐만 아니라 파스칼, 스탕달, 예수 등 역사적 인물들도 동행했다. 이들의 철학과 사상을 개별적으로 접하면 지루하고 딱딱하다. 그러나 사랑, 알랭 드 보통과 집합적으로 만나니 흥미로웠다 자연스러웠다.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녹여내는 알랭 드 보통의 능력이 드러난 책 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추상의 구체화에 성공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유쾌하고 위트 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 일까? 미친 듯 한 통찰력과 공감유도 능력이었다.

 


 사랑의 발단. 사랑하는 대상의 ‘이상화(理想化)’,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면의 의미’. 사랑의 전개. 왜 나 따위를 사랑하는가? ‘마르크스주의’. 서로를 공유하는 우리, 그것의 확산 ‘친밀성’. 사랑의 위기. 익숙함에 취할 무렵 ‘마음의 동요’.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사이 ‘행복에 대한 두려움’. 피어나는 질투심과 이기주의 ‘낭만적 테러리즘’. 사랑의 절정. 왜 나인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심리적 운명론’. 죽음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사랑의 불멸성 증명 ‘자살’. 사랑의 결말. 왜 우리는 그냥 사랑할 수 없는 것 일까? 불합리하고도 불가피한 사랑 ‘사랑의 교훈’.

 


 극단적인 사례가 종종 있어 아쉽긴 했지만 사랑, 그 일련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현실적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죽하면 필자와 현 여친과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하며 읽었을 정도다.

 


 필자는 공감가는 구절이 있을 때, 연필로 줄을 치며 읽는 버릇이 있다. 이를 다시 필사까지 해 본다. 보통 책은 필사를 하면 2-3페이지 정도 나온다. 과거의 필사노트를 펼쳐보니 처음 접했을 때의 이 책도 2페이지 필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읽었을 때의 필사는 달랐다. 5페이지 정도 나왔다. 어떤 챕터를 읽을 때는 그 챕터의 모든 구절을 밑줄 긋고 싶다는 욕망까지 솟구쳤을 정도였다.

 


 그간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역시 그는 사랑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나는 작가였다. Dr. LOVE. 그의 다음 사랑 이야기를 고대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ps.  예전의 글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27. 12:13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정영목 역



 

 '일' .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지니고 있을 것 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단, 인생살이의 치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보통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일에 관해서 조금은 다른 관점을 얘기한다.

 


 “일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다.”


 

 위에서 언급한 발버둥치는, 어쩔 수 없는 생명력이 아닌 숭고하고 즐거운 생명력이라 주장한

다.


 

 일은 우리의 정신을 그 곳(일)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에 몰두하면서 상대적으로 더 작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거기서 성취를 얻는다. 보람을 느낀다. 발전해서 삶에 대한 정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뒤 따라오는 결과물들, 심지어 피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산물로 여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더 큰 괴로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일’은 숭고하다. 이 논지가 알랭 드 보통이 주장하는 일의 숭고하고 즐거운 생명력이다.

 


 정말 많이 고민했다. 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일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처럼 일은 어쩔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수단인 것 일까? 아니면 알랭 드 보통의 생각처럼 숭고하고 즐거운 생명력인가? 이윽고 결론에 다다랐다. 다소 허무하고 적확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결론이었다. 일의 의미는 ‘개별적’이다.

 


 필자가 준비하고 있는 언론고시를 통해 개별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언론고시’란 언론사 입사시험을 고시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수많은 지원자, 그에 비해 현저히 적은 T.O. 그만큼 힘들고 치열한 ‘언론고시’다. 하지만 아무리 힘겨운 언론고시라 해도 합격자는 있는 법. 합격자들은 원하고 원했던 언론사에 입사해 하기를 갈망했던 일을 하게 된다. 반면 불합격자들은 차선책을 강구하게 된다. 언제까지나 기약 없는 언론고시에 매달릴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언론고시에 비해 T.O가 많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합격한 그 곳에서 일 하게 된다.

 


 이들에게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자의 경우 일이란 즐겁고 행복하고 숭고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숭고한 생명력이 발현되기 쉬울 것 이다. 후자의 경우 일이란 발버둥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꿈을 못 이뤘다는 내제된 우울감 속에서 살아간다. 이 우울감이 일을 ‘생존의 수단’으로 이끈 것 이다. 즉 일의 의미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마다 개별적인 것 이다.

 


 일의 의미뿐만 아니라 일, 그 자체에 관한 여러 생각들도 해봤다. 그 중 하나가 일(직업)에도 귀천이 있나? 라는 질문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의 ‘비스킷 공장’ 챕터에서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필자 또한 알랭 드 보통과 의견을 같이 했다. 어떤 직업이 탄생한 연유는 사회가 그 직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필요’라는 동등한 전제를 가지고 모든 직업들이 탄생했으므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 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일들이 사회의 필요에 있어서는 동등했지만 필요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등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필요로 하는 정도가 높을수록 그 일이 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상은 말라가고 현실에 젖어가면서 생긴 생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마음이 불편하긴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에도 귀천이 있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사실 이 책은 그간 나온 알랭 드 보통의 책 중에서 최악이라 평할 수 있다. 에세이라는 장르적 특성 탓 일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편협하고 협소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일’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깊이 숙고해볼 수 있어서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아! 그리고 지금 몸담고 있는 군대, 즉 군인이라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는데 ……. 이만 글을 마치겠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25. 18:49

불안

 

알랭 드 보통 (소설가) 저 



 요즘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품고 있는 감정은 ‘불안’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말 그대로 ‘자본’의 사회다. 자본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본의 유무에 따라, 정도에 따라 사람들은 불안을 품게 된다. 아이러니한건 자본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모두 불안 속에 산다는 것 이다. 자본이 많은 사람은 이 자본을 유지할 방법에 관하여, 없는 사람은 이것을 늘릴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며 불안해한다.

 


 불안은 不(아니 불)자를 쓴다. 즉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필자는 불안을 보통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여긴다. 불안이 지니는 ‘삶의 원동력’이라는 측면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필자의 생각과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은 어떻게 비견되는 지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펼쳤다.


 

 알랭 드 보통은 ‘지위’의 정의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지위, 단순히 말하면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위를 나타내는 특정 기준은 변화했다. 하지만 높은 지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화하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안이 시작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높은 지위 = 성공 이라는 명제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을 갈구한다. 성공 자체를 갈구하는 행동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 및 사회적 원인’ 이라는 요소가 개입됨과 동시에 불안의 씨앗이 발아한다.

 


 이제부터 개인 및 사회적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사랑결핍’.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불안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것 이다.개인적으로 사랑 결핍에 따른 불안은 가장 본능적이고 궁극적인 단계의 불안이라 생각한다. 무시를 두려워하고 사랑을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천성이다. 물질적 관점에 따른 불안도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론 사람들의 관심, 즉 사랑을 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결핍에 따른 불안을 가장 짧게 서술했다. 그러나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속물근성’. 속물근성도 사랑결핍과 비슷한 맥락이다. 속물근성은 말 그대로 속물근성이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들을 좋게 보고 그들과 친해지려고 하는 근성, 그 반대의 사람들을 반대로 대하는 근성. 과거보다 현재가 이러한 속물근성이 더 심화됐다는 게 이 챕터의 요지다. 이 챕터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기대’. 우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진보를 이룬 오늘 날,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는 불안과 동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꽤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불안은 자존감 하락에서도 올 수 있다. 자존감은 기대와 관련이 있다. 자존감 = 기대/한 일 이기 때문이다. 즉 기대를 낮추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고 불안을 낮출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 자존감-기대의 관계가발전해서 불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러한 알랭 드 보통의 관점은 굉장히 신선했다.

 

 

 ‘능력주의’. 능력주의도 기대, 속물근성과 비슷한 맥락이므로 한 문장을 인용하며 마무리 하겠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불확실성’. 현재에 사는 우리가 불안에 떠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이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별다른 언급 없이 지나가겠다.

 


 다음은 해결책들 이다.


 

 ‘철학’. 철학자는 이성, 양심을 강조했다. 자신만의 기준을 정립하여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굴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줄 잣대를 세우라는 것 이다. 즉 ‘기준 적용’이 철학이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철학에서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파트는 ‘지적인 염세주의’다. 필자가 살면서 추구하는, 필자만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파트를 읽을 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되었던 말 몇 개를 적어보겠다. ‘상포르’의 말,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그리고 지적인 염세주의의 약점, 과도하면 친구가 없어 질 것이다.


 

 ‘예술’. 예술은 예전부터 확실히 불안을 덜어줄 수 있는 처방전 중 하나라 생각해왔다. 예술은 우리 현실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요소는 비극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비극은 말 그대로 비극적 내용을 다룬다. 우리가 불안으로 인해 맞을 수 있는 수많은 비극적인 결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안의 결과를 미리 접함에 따라, 불안이 안겨줄 수 있는 무서움에 대한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게 된다.


희극은 비극과 다른 방식으로 불안을 덜어준다. 바로 ‘풍자’다. 풍자를 통해 불안을 가중시키는 개인이나 사회에 통쾌한 ‘엿’을 먹인다. 이 엿을 통해 우리는 내제된 불안을 덜어내는 효과를 얻는다.



 ‘정치’. 정치는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이다. 지위에서 오는 불안을, 지위를 상승시키는 방법으로, 즉 불안의 핵심을 건드려 불안을 더는 해결책이다. 지위에서 오는 불안을, 지위를 상식시키는 방법으로, 즉 불안의 핵심을 건드려 불안을 더는 해결책이다. 이 파트는 광범위하므로.. 이 글에선 패스하겠다.

 


 '기독교'. 통칭해서 종교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비록 무교이자, 종교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필자지만 종교의 장점 중 하나는 줄곧 인정해 왔다. 바로 종교를 통해 죽음에 대한 불안을 덜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종교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알랭 드 보통 또한 이 같은 관점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에 관해 논한다. 또한 관련해 흥미로운 옛 사람들의 관점도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것, 뭣 하러 잠시뿐인 지위에 목을 매고 불안을 촉진시키냐는 관점이었다. 과거 수많은 예술가도 이 관점에 동의하며 자신들의 작품에 이런 관점을 담았다. 이 관점은 분명 흥미롭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 죽음에 상관 말고 자기 끌리는 대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보헤미아’. 처음 전문적으로 접한 보헤미안들은 멋있었고 화려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용어를 빌리자면, 영혼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 너무, 과하게 이를 추구해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헤미아는 물질적 수단을 통한 지위보다는 정신적 성숙을 추구했다. 관련 지위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고 위계를 설계했다.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대안 지위를 마련했다. 불안을 덜기 위해 삶의 방향까지 바꾸는, 대범하고도 매력적인 불안의 해결책 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개인감정에 치우친 서술을 주로 선보였다. 사랑 3부작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더 사회 감정에 치우친 서술을 선보였다. (‘불안’은 개인감정의 한 종류이지만,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사회 감정이라 생각했다.) 사회 감정을 다루는 알랭 드 보통?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낯섦이 더해지니 더욱 인상적이었다. 왜 ‘불안’이 알랭 드 보통 대표작으로 손꼽히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