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016. 9. 2. 12:35

채식주의자

 


한강(소설가) 저


 

 ‘꿈을 꿨어. 주위에는 온갖 날카로운 것들이 널려 있었지. 동물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벼와 살도 함께 있었어. 그것들 밑에는 미지근한, 검붉은 액체들이 뒤덮여 있었지. 피였어. 순간 내 몸엔 소름이 돋아왔어. 내가 누군가를 죽인 느낌. 누군가 나를 죽인 느낌. 혼돈과 공포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어.’

 

 영혜는 꿈을 꿨다. 자고 일어난 후에도, 꿈은 잊히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꿈은 영혜의 사고를 지배했다. 영혜의 행동을 지배했다. 그렇게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언젠가 주관과 객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주관과 객관 간극에 존재하는 엄밀한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객관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성질일까? 장고 끝에 내린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수의, 동일한 주관들로 이루어진 집합체가 객관이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상대성과 절대성의 관계로 발전한다. 절대성 또한 다수의 동일한 상대성으로 이루어진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전관계는 비정상과 정상 관계로 귀결된다. 주관의 심화는 비정상이 되고, 객관의 심화는 정상이 된다. 이 논리는 고스란히 우리의 세계로 스며든다. 그리고 ‘폭력’을 창조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육식을 지양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킨 행동이다. 이 행동은 곧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상대성을 지니게 됐다. 보통의 사람들은 육식을 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혜의 행동은 존중받는 상대성이 되지 못했다. 육식을 행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영혜를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그 순간 폭력이 시작됐다. 그들은 그들이 정의한 ‘정상’으로 전환시켜 준다며 수많은 폭력을 자행했다. 영혜에게 폭력적 세계가 현실에 펼쳐졌다. 영혜는 ‘인간’의 잔인함이 폭력을 낳고, 폭력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자각했다. 영혜의 꿈에 나타난 광경이 영혜가 목격한 폭력적 세계였다는 점을 자각했다. 영혜는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적 세계를 끌어안을 수 없었다. 영혜는 폭력적 세계로의 초대를 거부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택했다. 영혜는 ‘자기 파괴’를 통해, ‘퇴행의 거듭’을 통해 철저히 비인간화를 추구했다. 동시에 영혜 자신은 한그루의 나무가 되길 갈망했다. 처절하고도 숭고한 한그루의 나무 영혜였다.

 


 인혜는 폭력적 세계에서 정상으로 규정된 사람들 중 한 명 이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고요히, 그리고 잔잔하게 살아왔다. 그녀의 누이인 영혜가 자기 파괴의 일환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을 때조차, 남편의 이기적 욕망이 그녀의 영혼을 번민했을 때조차, 그녀는 인내했다. 하지만 인내가 폭력의 제거를 뜻하지는 않았다. 영혜와 그녀의 남편이 빚어낸 비디오 한 편이 영혜의 신념을 뒤흔들었다. 폭력적 세계와의 공존을 원했던 인혜. 그런 그녀에게 극악의 폭력이 가해졌다. 인혜는 영혜의 저항을 이해하는데 이르렀다. 그녀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자신의 핏줄, 지우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폭력적 세계 속에서 저 아름다움을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인혜는 폭력적 세계 안에서 피어날 아름다움을 열망하며 폭력적 세계를 끌어안기로 했다. 그리고 폭력적 세계로 회귀했다.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 되는 점은 무엇일까? ‘사고(思考)’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고가 만들어낸 폭력적 세계는 사고의 전제화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폭력적 세계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 영혜의 삶인가? 인혜의 삶인가?

 

 

 어두운 문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어두운 고민을 안겨준, 어두운 연작소설.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