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Culture Life2017. 8. 29. 20:42

대학

 

1.

스무 살, 재수할 때 까지는 대학이 전부인 줄 알았다. 대학 잘 가아지 인생이 핀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명제를 진리로 강요받으며 자라왔으니까. 그러나 이 명제는 스물 한 살, 대학 1년을 다닌 후 처참히 부셔졌다.

 

2.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학교 이름이 고등이 아닌 ’. 그럼 강의도 진짜 이름에 맞는 강의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 뭐 이런 정도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2주 정도 지나보니 알게 됐다. 내 동경은 그저 막연한 것 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혹여나 우리 학교만 이런 게 아닐까 했다. 당시 여친의 학교 가서 몰래 청강을 해봤다. 역시나였다. 대학이란 가두리를 벗어나 방송국 조연출을 하면서, 인턴기자를 하면서 배운 게 훨~~씬 많았다.

 

3.

혹자들은 반문한다. 네가 수업을 안 듣고 부정적으로만 편향적 사고를 하니 그리 된 거 아니냐.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수업을 안 들은 건 아니다. 1학년 때 과탑도 먹어봤다. 여태까지 학기 중 성적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다. 편향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아니다. 3학년을 바라보는 지금의 귀납적 사고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4.

그들은 또 반문한다. 대학이 싫으면 자퇴하면 되지 않느냐. 왜 돈을 그렇게 낭비 하냐. 1학년 때 내 가방 한 편에는 자퇴서가 함께했다. 장학금을 받아 감면돼서 나오는 등록금 몇 십만원 내기가 싫어 이 마저도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왜 지금도 투덜거리며 다니고 있냐고? 대학 타이틀 마저 없으면 나는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5.

방송국 조연출을 할 수 있었던 이유, PD들이 나를 좋아했던 이유, 인턴 기자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서평을 쓰며 지낼 수 있었던 이유, 그 밖의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내가 갖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 다 내 대학 타이틀 때문이었다. 심지어 드라마 PD 마저 대부분이 4년제 대졸 이상이 기본 자격 조건이다.

 

6.

그렇다. 어제 개강을 했다. 오늘까지 학교를 다녔다.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다. 아 이번학기는 계절학기 까지 들어야 하는구나 망할.

'Non Culture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자타임  (0) 2017.09.10
근황 (2)  (0) 2017.09.04
영삼성 열정기자단 10기 면접 후기  (0) 2017.08.18
저한테 당신들의 YOLO를 강요하지 마세요  (0) 2017.08.01
웹소설  (0) 2017.07.12
Posted by AC_CliFe
Book2016. 10. 1. 18:59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The Course of Love’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여친이 보낸 메시지의 전문이다. 사랑의 과정? 오랫동안 사귀어온 관계. 그렇기에 지극히 쿨한 관계. 이런 관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답장을 보냈다. ‘뭔 x소리?’ 답장이 왔다. ‘The Course of Love' 똑같은 답장이었다. 대화가 진전될 기미가 안보였다. 읽씹했다. 몇 분 후, 여친한테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알랭 드 보통이 새 책을 냈다고 한다. ‘The Course of Love'는 그 책의 제목이었다. 닥터 러브가 새 책을 냈다고? 그것도 소설? 온라인 서점으로 들어가 바로 결재버튼을 눌렀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을 통해 낭만적 연애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마음껏 뽐냈다. 필자는 알랭 드 보통 만의 깊은 통찰에 감탄하며 이 시리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편엔 아쉬운 점도 있었다. 보통의 ‘연애’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 필자가 하고 있는 장기간 연애나 결혼까지 발전한 특별한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The Course of Love’에서 항상 사랑의 초중반에만 통찰한 알랭 드 보통 이었다.

 

 

 하지만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The Course of Love’ 중 사랑의 후반부에 집중한 소설이었다. 즉 그 후의 일상에 관심을 둔, 필자의 기대를 충족시킨 소설이었다. 그래서인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보다 더 흥미롭게 읽었다.

 

 

 언젠가 여친한테 물었다. 결혼이란 현실이 다가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여친은 대답했다. 결혼은 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사랑을 결혼이란 이름에 가둔다고 사랑의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결혼이라는 의식은 우리의 사랑을 더 공고히 다져줄 것이라고. 이상주의자인 그녀였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녀와 상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필자. 곧바로 반문했다. 결혼은 일상의 공유를 뜻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혹은 지금의 연애관계에선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는 보통의 커플이 아니다! 자그마치 8년을 같이 한 커플이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다! 아까도 말했듯이 결론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특별한 커플이기에 결혼을 해도 특별할 것이다! 오글거렸다. 하지만 기특했다. 그리고 설득 당했다. 우리 둘은 결혼해도 타(他) 커플들과는 다른 특별한 부부로 남겠지. 일상이 개입한다 하더라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특별한 커플.

 

 

 이러한 믿음을 되뇌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갈수록 이 믿음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혼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다는 걸 필자와 여친은 모르고 있었다. 집안일이라는 변수, 아이들이라는 변수, 외도라는 변수, 중년의 나이라는 변수 등등. 낭만적 연애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일상’의 변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혼이란 행위는 낭만주의가 아닌 현실주의로 변색되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일상에 매몰되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이 정의한 결혼의 의미가 일견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알랭 드 보통의 결혼에 대한 일상적 통찰은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에서 정점을 찍는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귀가 깔려있어 단 한사람과 사실상 열두 번의 이혼과 재혼을 겪은 라비.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주인공 라비. 그로 인해 보다 성숙해진 라비. 그래서 낭만을 넘어 결혼이란 현실에 순응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라비와 커스틴.

 

 

 책을 읽기 전 되뇌였던 믿음은 이미 가루가 된지 오래였다. 그 자리는 결혼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믿음을 산산조각 낸 알랭 드 보통에 대한 경외 섞인 원망과 함께한 채.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다 읽은 후 다시 한 번 여친한테 물었다. 결혼이란 현실이 다가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여친은 대답했다. ‘The Course of Love... ㅠㅠ.’ 사랑에 대한 집요하고도 능숙한 통찰로 독자를 이래저래 미치게 만드는 이 시대 최고의 일상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이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16. 19:10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소설가) 저



 

 필자는 꽤나 현실적이다. 아니 ‘꽤나’라는 표현보다는 ‘굉장히’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23살이라는 적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릇에 넘치는 ‘이상’을 꿈꾸다가 고꾸라졌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상은 허황된 행복을 안겨주고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생각했다. 따라서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응원해주고 싶다기보다는 말리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들이 이상을 꿈꿀 바에는 현재에 충실하면서, 현실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이상과 현실에 대한 기존과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얼개는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다. 5년 전, 자신의 이상(데이지)을 만난 개츠비,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좇아 개츠비를 떠났다. 5년 후, 현실을 갖추고 돌아온 개츠비. 이상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그이 모습을 그린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다.

 

 

 현실적이었던 필자가 읽었을 때는 개츠비가 이해가지 않았다. 삶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그의 생각,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그의 집념, 안쓰럽고 안타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불현 듯 필자도 결국 개츠비 류(類)의 사람이라는, 개츠비적 (Gatsbyesque) 사람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현실적이라고 주장하던 내가! 현실적이기에 지금의 내가 됐다는 은근한 자부심도 갖고 있었던 내가 개츠비적 사람이라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개츠비를 통해 이상과 현실을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을 서로 동떨어진 게 아니었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 즉 인관관계로 묶여있었다. 개츠비와 데이지가 떨어져 있던 5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동안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이상을 꿈꿨다. 이상을 위해 현실에 충실했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조직폭력배 마이어 울프심을 만났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법을 어기면서 돈을 끌어 모았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개최했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조던을 만났고 닉을 만났다. 그리고 데이지를 만났다. 현실에 충실하니 이상이 따라온 것 이다.

 

 

 순간 필자의 삶도 오버랩 됐다. 필자가 마주했던 수많은 실패의 현실, 필자의 이상을 위한, 하나의 계단이었다.

 

 

 혹자는 이상을 이루지 못한다면 현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맞다. 이상을 이뤘을 때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욱 찬란하고 훨씬 가치 있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이상을 쟁취하는 데 실패했다면 어떤가. 자신의 이상만을 위해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무릅쓰면서 나아가는 인간의 현실 그 자체가 ‘위대’하지 않은가? 마치 ‘위대한’ 개츠비처럼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명작으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피츠제럴드 특유의 ‘그 시대 배경 묘사’다.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직후, 재즈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당시의 미국을 소설에 완벽하게 녹여냈다. 다독을 한.. 편이라 자부하는 필자도 배경을 소설에 완벽하게 구현해 낸 작품은 처음 봤다. 실례로 전쟁 직 후의 사람들의 무질서, 아노미 상태로 인한 향락에 찌든 모습을 표현한 점은 압권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위대한 개츠비’가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상과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선각시켜준 점이다.

 

 

 현실의 의미, 이상의 가능성에 대해 깨달음을 준 개츠비, 그리고 피츠제럴드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이상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였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3. 11:27

달과 6펜스

 

 

 ‘일상’은 우리네 삶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장치다.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만인의 투쟁을 바로잡아주고, 정상의 지침을 마련해 준 것이 지금의 일상이다. 일상은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술 혼에 인생을 맡긴, 예술, 아름다움이라는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힌 예술가들이었다.

 


 美(미)에 취해 오로지 예술을 추구하며, 예술 혼을 불태우며 살았던 예술가들. 예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은 일상이라는 질서에서 벗어나 탐미적 광기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 일까. 이러한 의문이 한창 달아오를 때 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두 분류로 정의할 수 있다. 달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영롱하게 빛나는 달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비춘다. 영혼을 매혹하면서 우리의 주관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 자극에 반응하여 자신만의 열정과 광기를 극적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이 달의 세계 사람들이다.

 


 6펜스도 빛난다. 조금은 거친 빛을 내는 6펜스는 우리의 육체만을 비춘다. 육체를 비추면서 우리를 이끈다. 세속적인, 그리고 타성에 젖은 일상으로. 세속의 애환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6펜스 세계의 사람들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달의 세계 사람이다. 아니. 6펜스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온 이주민이다. 런던의 증권 브로커로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온 그.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일상을 버리고 낯선 타지, 파리로 떠난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달의 세계로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 후 탐미적 광기에 빠져든 채, 영혼과 본능의 세계에 빠져든 채 오로지 예술, 그림만을 위한 삶을 영위한다.

 


 문득 서두에서 밝힌 필자의 의문이 다시 생각났다. 무엇이 스트릭랜드를 예술가들의 生(생), 그리고 달의 세계로 초대한 것일까? 스트릭랜드의 궁극적 목표, 열반 혹은 진리,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일상이 지배하는 6펜스 세계에는 속물적 근성이 만연해 있었다. 사람들을 나태와 권태로 찌들게 하는 안락이 팽배해 있었다. 사람은 결국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일상에 처절하게 매몰됐다. 세속적 화가 스트로브, 속물근성의 스트릭랜드 부인, 히스테리적 여자 블란치 등이 6펜스 세계를 대변한다. 스트릭랜드는 일상에 찌든 6펜스 세계 주민들에게 경멸과 냉소를 남긴 채 달의 세계로의 초대를 수락했다.


 

 그렇다면 과연 스트릭랜드는 달의 세계에서 자신의 갈망을 누릴 수 있었을까? 스트릭랜드는 그림이라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이상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적 열망을 극에 다다랐다. 문둥병이라는 육체적 고난도 그의 갈망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갈망, 그리고 열반, 진리, 자유는 타히티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의 갈망은 타히티 본가에 그린 그림, 원시적 낙원의 세계로 형상화 됐다. 그리고 난 후, 달의 세계에서의 그의 여정을 마감했다.

 


 <달과 6펜스>를 완독하니 스트릭랜드와 필자가 미묘하게 닮은 부분이 있었다. 필자 또한 스트릭랜드처럼 6펜스 세계를 혐오하는 부류였다. 6펜스 세계에 만연해있는 특유의 세속적 분위기에 거부감이 들었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해체시키는 문명에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필자를 염세주의로 인도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와 필자에겐 결정적 차이가 존재했다. ‘달의 세계’로의 이주다. 스트릭랜드는 과감했다. 필자는 두려웠다. 두려움으로 인해 일상과의 타협을 마주했다. 그리고 일상에 매몰됐다. 이 미세한 차이가 스트릭랜드를 위인으로 만들었고 필자를 범인으로 만들었다.

 


 혹자들은 <달과 6펜스>를 광적인 예술가들에 대한 옹호만 할 뿐 다른 주제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가치한 작품이라 혹평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속에 살아가던 독자들에게 낭만적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자유에 대한 갈망을 꿈틀거리게 한 것만으로도 <달과 6펜스>의 가치는 충분했다. 인간 근원의 욕망을 건드리는 위험하고도 낭만적인 작품,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였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