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016. 9. 4. 16:11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혹자들은 말한다. "책은 한 번 읽는다고 읽은 게 아니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한다." 요즘같이 책 안 읽는 분위기가 만연한 사회에서, 책 한 번 읽기도 벅찬데 두 번 읽으라고? 책을 한 번 더 읽는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지니며 살아온 필자였다. 하지만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혹자들의 말이 진리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을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다.

 


 필자는 이 책을 지금으로부터 1년 반 전에 처음 접했다. 독서토론 동아리 회장에게 ‘알랭 드 보통’ 이라는 작가를 추천받았다. 더불어 이 책도 추천받았다. 그래서 읽게 됐다. 그 때도 이 책은 분명 흥미로웠다. 사랑에 알랭 드 보통이 더해지니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가슴속에 큰 울림이 느껴지지 못했다. 재미는 있지만 가벼운 느낌? 그렇게 이 책은 필자의 기억에서 차츰 사라져 갔다.

 


 지난주, 미국에 있는 여친과 통화를 했다. 군대에 있는 필자. 미국에 있는 여친. 이러한 특수한 환경 때문인가? 항상 전화통화를 하고 나면 공허함만 남는다. 그 날은 더 심했다.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도서관 컨테이너로 향했다. 그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필자와 여친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서로 엇갈려있는, 어찌 보면 이상한 관계인데! 이러한 의문을 품으며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이 책의 소재는 ‘나’와 ‘클로이’의 사랑 이야기다. ‘나’와 클로이의 사랑의 시작부터 끝을 그린다. 사실 알랭 드 보통이 선택한 이 소재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다. 한 커플의 시초와 종말을 담은 스토리. 그간 많은 사랑 관련 책들이 다룬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들에는 또 다른 문제점도 존재했다. 바로 추상의 구체화다. 사랑이라는 추상적 감정을 활자라는 구체적 언어로 표현 하는 것 이다. 대부분의 사랑 서적은 추상의 구체화에 실패했다. 현실의 사랑과 언어의 사랑에서 괴리감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즉 공감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알랭 드 보통. Dr. 러브였다. Dr. 러브는 알랭 드 보통의 별명이다.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적확하게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별명을 얻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필자의 머릿속엔 이 별명이 다시 한 번 상기됐다. 과연 Dr. 러브였다. 위에서 언급한 두 문제점을 완벽히 상쇄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소재 사랑은 굉장히 진부한 소재다. 독자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예상이나 했던 것 일까? 알랭 드 보통은 사랑에 ‘철학’이라는 소스를 가미했다. 그러니 진부함이 새로움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사랑을 위해 많은 철학과 함께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했고, 비트겐슈타인과 함께했다. 마르크스도 함께했다. 뿐만 아니라 파스칼, 스탕달, 예수 등 역사적 인물들도 동행했다. 이들의 철학과 사상을 개별적으로 접하면 지루하고 딱딱하다. 그러나 사랑, 알랭 드 보통과 집합적으로 만나니 흥미로웠다 자연스러웠다. 철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녹여내는 알랭 드 보통의 능력이 드러난 책 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추상의 구체화에 성공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유쾌하고 위트 있게 풀어낼 수 있는 것 일까? 미친 듯 한 통찰력과 공감유도 능력이었다.

 


 사랑의 발단. 사랑하는 대상의 ‘이상화(理想化)’,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면의 의미’. 사랑의 전개. 왜 나 따위를 사랑하는가? ‘마르크스주의’. 서로를 공유하는 우리, 그것의 확산 ‘친밀성’. 사랑의 위기. 익숙함에 취할 무렵 ‘마음의 동요’.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사이 ‘행복에 대한 두려움’. 피어나는 질투심과 이기주의 ‘낭만적 테러리즘’. 사랑의 절정. 왜 나인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심리적 운명론’. 죽음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사랑의 불멸성 증명 ‘자살’. 사랑의 결말. 왜 우리는 그냥 사랑할 수 없는 것 일까? 불합리하고도 불가피한 사랑 ‘사랑의 교훈’.

 


 극단적인 사례가 종종 있어 아쉽긴 했지만 사랑, 그 일련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현실적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오죽하면 필자와 현 여친과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상하며 읽었을 정도다.

 


 필자는 공감가는 구절이 있을 때, 연필로 줄을 치며 읽는 버릇이 있다. 이를 다시 필사까지 해 본다. 보통 책은 필사를 하면 2-3페이지 정도 나온다. 과거의 필사노트를 펼쳐보니 처음 접했을 때의 이 책도 2페이지 필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번 읽었을 때의 필사는 달랐다. 5페이지 정도 나왔다. 어떤 챕터를 읽을 때는 그 챕터의 모든 구절을 밑줄 긋고 싶다는 욕망까지 솟구쳤을 정도였다.

 


 그간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역시 그는 사랑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나는 작가였다. Dr. LOVE. 그의 다음 사랑 이야기를 고대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ps.  예전의 글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3. 11:27

달과 6펜스

 

 

 ‘일상’은 우리네 삶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장치다.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만인의 투쟁을 바로잡아주고, 정상의 지침을 마련해 준 것이 지금의 일상이다. 일상은 우리에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술 혼에 인생을 맡긴, 예술, 아름다움이라는 주관적 욕망에 사로잡힌 예술가들이었다.

 


 美(미)에 취해 오로지 예술을 추구하며, 예술 혼을 불태우며 살았던 예술가들. 예술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은 일상이라는 질서에서 벗어나 탐미적 광기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 일까. 이러한 의문이 한창 달아오를 때 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두 분류로 정의할 수 있다. 달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6펜스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영롱하게 빛나는 달은 우리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비춘다. 영혼을 매혹하면서 우리의 주관적 욕망을 자극한다. 이 자극에 반응하여 자신만의 열정과 광기를 극적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이 달의 세계 사람들이다.

 


 6펜스도 빛난다. 조금은 거친 빛을 내는 6펜스는 우리의 육체만을 비춘다. 육체를 비추면서 우리를 이끈다. 세속적인, 그리고 타성에 젖은 일상으로. 세속의 애환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6펜스 세계의 사람들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달의 세계 사람이다. 아니. 6펜스 세계에서 달의 세계로 온 이주민이다. 런던의 증권 브로커로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온 그.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일상을 버리고 낯선 타지, 파리로 떠난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달의 세계로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 후 탐미적 광기에 빠져든 채, 영혼과 본능의 세계에 빠져든 채 오로지 예술, 그림만을 위한 삶을 영위한다.

 


 문득 서두에서 밝힌 필자의 의문이 다시 생각났다. 무엇이 스트릭랜드를 예술가들의 生(생), 그리고 달의 세계로 초대한 것일까? 스트릭랜드의 궁극적 목표, 열반 혹은 진리,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일상이 지배하는 6펜스 세계에는 속물적 근성이 만연해 있었다. 사람들을 나태와 권태로 찌들게 하는 안락이 팽배해 있었다. 사람은 결국 세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일상에 처절하게 매몰됐다. 세속적 화가 스트로브, 속물근성의 스트릭랜드 부인, 히스테리적 여자 블란치 등이 6펜스 세계를 대변한다. 스트릭랜드는 일상에 찌든 6펜스 세계 주민들에게 경멸과 냉소를 남긴 채 달의 세계로의 초대를 수락했다.


 

 그렇다면 과연 스트릭랜드는 달의 세계에서 자신의 갈망을 누릴 수 있었을까? 스트릭랜드는 그림이라는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이상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타히티에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적 열망을 극에 다다랐다. 문둥병이라는 육체적 고난도 그의 갈망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갈망, 그리고 열반, 진리, 자유는 타히티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의 갈망은 타히티 본가에 그린 그림, 원시적 낙원의 세계로 형상화 됐다. 그리고 난 후, 달의 세계에서의 그의 여정을 마감했다.

 


 <달과 6펜스>를 완독하니 스트릭랜드와 필자가 미묘하게 닮은 부분이 있었다. 필자 또한 스트릭랜드처럼 6펜스 세계를 혐오하는 부류였다. 6펜스 세계에 만연해있는 특유의 세속적 분위기에 거부감이 들었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해체시키는 문명에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필자를 염세주의로 인도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와 필자에겐 결정적 차이가 존재했다. ‘달의 세계’로의 이주다. 스트릭랜드는 과감했다. 필자는 두려웠다. 두려움으로 인해 일상과의 타협을 마주했다. 그리고 일상에 매몰됐다. 이 미세한 차이가 스트릭랜드를 위인으로 만들었고 필자를 범인으로 만들었다.

 


 혹자들은 <달과 6펜스>를 광적인 예술가들에 대한 옹호만 할 뿐 다른 주제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가치한 작품이라 혹평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속에 살아가던 독자들에게 낭만적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자유에 대한 갈망을 꿈틀거리게 한 것만으로도 <달과 6펜스>의 가치는 충분했다. 인간 근원의 욕망을 건드리는 위험하고도 낭만적인 작품,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였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2. 12:35

채식주의자

 


한강(소설가) 저


 

 ‘꿈을 꿨어. 주위에는 온갖 날카로운 것들이 널려 있었지. 동물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벼와 살도 함께 있었어. 그것들 밑에는 미지근한, 검붉은 액체들이 뒤덮여 있었지. 피였어. 순간 내 몸엔 소름이 돋아왔어. 내가 누군가를 죽인 느낌. 누군가 나를 죽인 느낌. 혼돈과 공포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어.’

 

 영혜는 꿈을 꿨다. 자고 일어난 후에도, 꿈은 잊히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꿈은 영혜의 사고를 지배했다. 영혜의 행동을 지배했다. 그렇게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언젠가 주관과 객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주관과 객관 간극에 존재하는 엄밀한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객관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성질일까? 장고 끝에 내린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수의, 동일한 주관들로 이루어진 집합체가 객관이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상대성과 절대성의 관계로 발전한다. 절대성 또한 다수의 동일한 상대성으로 이루어진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전관계는 비정상과 정상 관계로 귀결된다. 주관의 심화는 비정상이 되고, 객관의 심화는 정상이 된다. 이 논리는 고스란히 우리의 세계로 스며든다. 그리고 ‘폭력’을 창조한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육식을 지양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킨 행동이다. 이 행동은 곧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상대성을 지니게 됐다. 보통의 사람들은 육식을 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혜의 행동은 존중받는 상대성이 되지 못했다. 육식을 행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영혜를 비정상으로 규정했다. 그 순간 폭력이 시작됐다. 그들은 그들이 정의한 ‘정상’으로 전환시켜 준다며 수많은 폭력을 자행했다. 영혜에게 폭력적 세계가 현실에 펼쳐졌다. 영혜는 ‘인간’의 잔인함이 폭력을 낳고, 폭력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자각했다. 영혜의 꿈에 나타난 광경이 영혜가 목격한 폭력적 세계였다는 점을 자각했다. 영혜는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적 세계를 끌어안을 수 없었다. 영혜는 폭력적 세계로의 초대를 거부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택했다. 영혜는 ‘자기 파괴’를 통해, ‘퇴행의 거듭’을 통해 철저히 비인간화를 추구했다. 동시에 영혜 자신은 한그루의 나무가 되길 갈망했다. 처절하고도 숭고한 한그루의 나무 영혜였다.

 


 인혜는 폭력적 세계에서 정상으로 규정된 사람들 중 한 명 이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 고요히, 그리고 잔잔하게 살아왔다. 그녀의 누이인 영혜가 자기 파괴의 일환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을 때조차, 남편의 이기적 욕망이 그녀의 영혼을 번민했을 때조차, 그녀는 인내했다. 하지만 인내가 폭력의 제거를 뜻하지는 않았다. 영혜와 그녀의 남편이 빚어낸 비디오 한 편이 영혜의 신념을 뒤흔들었다. 폭력적 세계와의 공존을 원했던 인혜. 그런 그녀에게 극악의 폭력이 가해졌다. 인혜는 영혜의 저항을 이해하는데 이르렀다. 그녀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자신의 핏줄, 지우가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폭력적 세계 속에서 저 아름다움을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인혜는 폭력적 세계 안에서 피어날 아름다움을 열망하며 폭력적 세계를 끌어안기로 했다. 그리고 폭력적 세계로 회귀했다.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 되는 점은 무엇일까? ‘사고(思考)’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고가 만들어낸 폭력적 세계는 사고의 전제화를 강제하기 시작했다. 폭력적 세계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 영혜의 삶인가? 인혜의 삶인가?

 

 

 어두운 문체,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어두운 고민을 안겨준, 어두운 연작소설.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30. 19:1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소설가) 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의 장르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어떤 이는 성에 관한 이야기라 평했다. 다른 이는 정치, 사회적 장르라 했다. 또 다른 이는 철학서, 신학 서라고 했다. 이러한 장르 논쟁을 보고 광고인 박웅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무한한 우주가 담겨있다.”

 


 그만큼 다양하고 수많은 장르를 품고 있는 책 이란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을 상징하는 단 하나의 장르는 ‘연애소설’이라 단언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선 극을 이끌어가는 두 개의 러브라인이 있다. 토마스-테레사의 러브라인, 사비나-프란츠의 러브라인이다.

 


 밀란 쿤데라는 사랑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메타포가 하나만 있어도 생겨날 수 있다.”

 


 토마스는 프라하의 풍족한 의사였다. 풍족한 사랑꾼이기도 했다. 그것도 가볍고 육체적인. 의사라는 직업에, 부유한 배경, 얼핏 보면 무거운, 영혼의 세계에 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랑이 있어서 육체적 관계만 추구하고, 그러다보니 자신은 점점 가벼워졌다. 테레사는 시골의 부족한 웨이트리스였다. 그녀는 시골, 부족함으로 대변되는 자신의 배경이 싫었다. 그녀 주위에는 경박한 엄마와 천박한 시골사람 뿐 이었다. 가볍고 육체적이었다. 그녀는 하루 발이 이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거움과 영혼의 세계를 꿈꿨기 때문이다. 그 때 자신의 이상처럼 보이는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연락처를 건네줬다. 토마스가 시골에 출장 왕진을 갔다가 식당에서 테레사를 만났고, 늘 그렇듯 육체적 사랑을 꿈꾸며 연락처를 건넨 것 이다. 프라하로 오면 연락하라는 말 또한 덧붙였다. 테레사는 이런 토마스의 행동에 의미부여를 했다. 그 연락처를 영혼의 세계로의 초대로 인식 한 것이다. 테레사는 ‘안나 카레리나’ 한 권과 자기 몸만 한 트렁크를 가지고 토마스의 집으로 찾아갔다. 토마스는 테레사를 동정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갈 곳 없는, 자기 몸만 한 트렁크를 지닌 그녀. 그는 연민을 느꼈다. 이 ‘연민’이라는 메타포가 ‘사랑’ 이라는 감정으로 진화하는 순간이다. 이를 계기로 둘은 사랑하기 시작했다.

 


 사비나는 무거운 배경의 소유자다. 그 당시 소련 침공으로 인해 공산주의 化 된 체코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어딜 가나 반체제 인사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화가라는 직업도 그녀를 오해하게 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하지만 개별적인 테레사는 달랐다. 그녀는 모든 체제를 부정 혹은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둘러싼 무거움과 달리, 토마스처럼 성 관계를 맺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가볍고 육체적인 사람이었다. 즉 무거운 배경을 증오하고 가벼움과 육체적 세계를 추구한 사비나였다. 프란츠는 이 사비나를 ‘경외’라는 메타포를 바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엄친아’ 프란츠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아왔다. 유명한 수학자로서 20대의 나이에 교수가 되는 등 굴곡이 없는 삶 이었다. 고난이 없던 삶이어서 그런지 사랑에 있어서도 영혼의 사랑, 무거운 사랑을 원했다. 그랬던 탓 일까? 변화, 혁명, 투쟁에 갈증을 느꼈다. 그 때 사비나아 그 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꿈꾸던 삶을 산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존경심, 나아가 경외심을 갖는다. ‘경외’라는 메타포가 이들의 사랑을 탄생시켰다.

 


 시작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두 커플의 끝은 판이했다. 다시 토마스-테레사 이야기를 해보겠다. 토마스는 가벼운 사람이었다. 영혼의 세계가 아닌 육체의 세계의 주민이었던 것 이다. 테레사를 만나는 중에도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성관계를 맺었다. 오죽하면 그의 머리에서 다른 여자의 음부 냄새가 났을까? 토마스가 영혼의 세계 사람이라는 테레사의 판단이 틀렸던 것 이다. 이로 인해 둘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게 된다. 하지만 토마스는 테레사를 잊지 못했다. 다툼으로 인해 떨어져 있던 상황에도, 항상 그녀를 생각했다. 이 생각은 점점 깊어져갔다. 결국 그녀를 만나기 위해 토마스는 자기 자신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의사에서 시골 정비사로,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육체의 세계에서 영혼의 세계로 ‘이동’했다. 이러한 토마스의 ‘이동’으로, 혹은 그의 ‘희생’으로 둘의 사랑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사비나와 프란츠에게도 가치관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비나 또한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가벼운, 육체적인 사람이었다. 사비나의 가벼움은 ‘배반’이란 단어로 상징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키치를 혐오한 그녀는 키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국, 가족, 사랑을 배반한다. 모든 걸 가볍게 여기는 그녀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런 사비나에게 프란츠는 자신의 무거움을 내세우며 다가왔다. 그의 부인 아리클로드와 이혼까지 하며 사비나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자신을 무거움으로 이동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기희생을 원하지 않았다. 토마스ㅡ와 달리 선택의 기로에서 가벼움을 택했고 육체적 세계를 택했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이동’이 아닌 ‘유지’를 택한 것 이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 사랑은 비극적 결말은 맺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두 사랑 속에서 역사와 정치, 신학과 철학, 성과 사랑을 다룬다. 책의 시점 또한 주인공들 중 한명에서부터 전지적 시점까지 다룬다.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는, 까면 깔수록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양파 같은 책이다. 그래서 어렵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단 한 가지만 기억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토마스처럼 ‘이동’과 ‘희생’을 하며 사랑할 것인가, 사비나처럼 ‘유지’를 하면서 사랑할 것 인가? 참고로 필자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것 같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29. 12:47

illionaire life

 

- Dok2

 

 

1.

 Dok2의 레이블 이름은 ‘illionaire’다. ill과 billionaire의 합성어 ‘illionaire.’ 직역하면 멋진 부자 정도 되겠다. Dok2는 레이블 이름에 걸맞은 행보를 걸어왔다. 자신의 ill한 랩을 무기로 billionaire가 되는데 성공한, 기적과도 같은 인간승리를 선보인 Dok2. illionaire life를 살고 있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 한 권을 냈다.

 

 

2.

 Dok2의 책 <illionaire life>는 사실 서평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본 독자는 알겠지만 책 자체가 무언가 많은 내용을 함축한 책은 아니었다. 장르를 규정하기도 쉽지 않았다. 에세이라 하기에는 글의 콘텐츠가 부족했고 포토북이라 하기에는 주제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 Dok2의 illionaire life는 그만의 철학으로 빚어낸 완전한 life 였기 때문이다.

 

 

3.

 힙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Dok2의 스타일을 다 알 것이다. 스냅백을 삐딱하게 쓰고, 금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전용 마이크를 통해 부와 명예를 보란 듯이 자랑하는 래퍼. 한국을 지배하던 정서와 반대되는 스타일의 래퍼인 그에게 대중들은 환호보다는 비난의 시선을 던졌다.

 

 

4.

 하지만 그 시선은 그저 Dok2의 외양만 본, 자극적인 가사만 본 자들의 것이었다. Dok2에겐 돈과 명품의 Swag도 있었지만 그를 진정한 illionaire life를 인도한 것은 희망과 격려의 Swag이었다.

 

 

5.

 Dok2는 항상 긍정을 이야기했다. Dok2는 항상 행복을 이야기했다. Dok2는 항상 평화를 이야기했다. Dok2는 항상 위로를 이야기했다. Dok2의 가사들은 단지 글자라는 표상에서 파상된 가식이 아니었다. 컨테이너박스에서 펜트하우스까지 올라간, 그만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가사들로 우리에게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사였다.

 

 

6.

 illionaire life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몸소 증명한 Dok2였기에 진정성 있게 다가온 책, 이상 Dok2의 <illionaire life>였다.



ps. 사실 본문에도 잠시 언급했다시피 책의 콘텐츠 자체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를 취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Dok2 본인의 이야기를 담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여러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도 본인의 진짜 모습일테니.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27. 12:13

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정영목 역



 

 '일' .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지니고 있을 것 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단, 인생살이의 치열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보통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일에 관해서 조금은 다른 관점을 얘기한다.

 


 “일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다.”


 

 위에서 언급한 발버둥치는, 어쩔 수 없는 생명력이 아닌 숭고하고 즐거운 생명력이라 주장한

다.


 

 일은 우리의 정신을 그 곳(일)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에 몰두하면서 상대적으로 더 작은 목표를 위해 달려가고, 거기서 성취를 얻는다. 보람을 느낀다. 발전해서 삶에 대한 정복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뒤 따라오는 결과물들, 심지어 피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산물로 여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더 큰 괴로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일’은 숭고하다. 이 논지가 알랭 드 보통이 주장하는 일의 숭고하고 즐거운 생명력이다.

 


 정말 많이 고민했다. 일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일에 대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처럼 일은 어쩔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수단인 것 일까? 아니면 알랭 드 보통의 생각처럼 숭고하고 즐거운 생명력인가? 이윽고 결론에 다다랐다. 다소 허무하고 적확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결론이었다. 일의 의미는 ‘개별적’이다.

 


 필자가 준비하고 있는 언론고시를 통해 개별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보겠다. ‘언론고시’란 언론사 입사시험을 고시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수많은 지원자, 그에 비해 현저히 적은 T.O. 그만큼 힘들고 치열한 ‘언론고시’다. 하지만 아무리 힘겨운 언론고시라 해도 합격자는 있는 법. 합격자들은 원하고 원했던 언론사에 입사해 하기를 갈망했던 일을 하게 된다. 반면 불합격자들은 차선책을 강구하게 된다. 언제까지나 기약 없는 언론고시에 매달릴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언론고시에 비해 T.O가 많은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합격한 그 곳에서 일 하게 된다.

 


 이들에게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자의 경우 일이란 즐겁고 행복하고 숭고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숭고한 생명력이 발현되기 쉬울 것 이다. 후자의 경우 일이란 발버둥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꿈을 못 이뤘다는 내제된 우울감 속에서 살아간다. 이 우울감이 일을 ‘생존의 수단’으로 이끈 것 이다. 즉 일의 의미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사람들마다 개별적인 것 이다.

 


 일의 의미뿐만 아니라 일, 그 자체에 관한 여러 생각들도 해봤다. 그 중 하나가 일(직업)에도 귀천이 있나? 라는 질문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의 ‘비스킷 공장’ 챕터에서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필자 또한 알랭 드 보통과 의견을 같이 했다. 어떤 직업이 탄생한 연유는 사회가 그 직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필요’라는 동등한 전제를 가지고 모든 직업들이 탄생했으므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 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일들이 사회의 필요에 있어서는 동등했지만 필요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등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필요로 하는 정도가 높을수록 그 일이 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상은 말라가고 현실에 젖어가면서 생긴 생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마음이 불편하긴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에도 귀천이 있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사실 이 책은 그간 나온 알랭 드 보통의 책 중에서 최악이라 평할 수 있다. 에세이라는 장르적 특성 탓 일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편협하고 협소했다.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일’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깊이 숙고해볼 수 있어서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아! 그리고 지금 몸담고 있는 군대, 즉 군인이라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는데 ……. 이만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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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8. 26. 12:41

1984


조지 오웰(소설가) 저


 

 과거,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다뤘던 적이 있다. 기술적 디스토피아 소설 중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평을 받았었다. 이 과정에서 조지 오웰의 <1984>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었다. 1984 또한 기술적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 문학이지만, ‘멋진 신세계’에 비해선 전체적으로 뒤떨어진다는게 필자를 제외한 동아리원들의 평이었다. 필자는 그 당시 <1984>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몇 년 후, 자대에서 한창 싸지방을 즐기고 있을 때, 1984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 순간을 목격했다. 음? 왜? 뭐지? 호기심에 이끌려 필자 또한 1984를 검색해 봤다. 다시 한 번 이 책이 주목받기 시작 한 것이다. 마침 자대 도서관에도 이 책이 있었다. 개론서만 읽어서 머리에 여유가 없는 요즘이기도 해서, ‘동물농장’ 이후 오랜만에 조지오웰과 함께 하기로 했다.

 


 <1984>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1984>의 주제, 전체주의의 폐해를 잔인하게 드러낸 현실적 측면이다.

 


 <1984>에서 당이 대중들의 세뇌를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거짓의 내면화’이다. ‘빅 브라더’라는 허구의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등으로 당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및 통제한다. 독제 체제의 기민한 유지와 권력의 극대화를 위한 방안이다. 나아가 당은 새로운 언어 편찬 사업, ‘신어’를 개편하면서, 즉 언어를 최대한으로 단순화시켜 대중들의 사유를 단순화시키기 까지 한다. 오로지 당에 대한 충성만 하라는 것 이다. 결국 대부분의 대중들은 ‘모순된 것을 알면서도 현실에선 임할 수 밖에 없는’ 이중사고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오세아니아의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맞다. 1950년 대, 세계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와 비슷하다. 특히 무솔리니의 파시즘,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의 스탈린주의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조지 오웰은 당시의 전체주의의 잔혹함과 잔학함을 기술적 디스토피아라는 수단을 통해 경고한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는 그만의 통찰력과 예리함이 돋보인 <1984>였다.

 


 이 뿐만 아니라 <1984>에선 전체주의에 맞서는 조지 오웰의 대안도 살짝 엿 볼 수 있었다. <1984>의 주인공, 윈스턴은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당, 그리고 ‘빅 브라더’에 맞서 마르크스주의적 생각을 갖게 됐다.

 


‘무산계급(노동자)의 힘으로 개혁을!’

 


 실제로 조지 오웰은 스탈린주의의 현실을 경험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1936년 이후 (나의)모든 진지한 저작은 모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민주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두 번째는 소설을 이끌어가는 <1984>의 문학적 측면이다. 사실 필자는 눈에 보이는 <1984>의 주제보다 더 인상깊었던 것이 이 문학적 측면이다. <1984>의 줄거리 구조는 꽤나 단순하다. ‘지배적인 체제에 저항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하지만 조지 오웰은 주인공 윈스턴의 심경변화, 구체적으로는 그의 사상의 변화를 정밀하고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특히나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든 다르게 생각해내려는 윈스턴의 처절함을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말그대로 처절하게 잘 그려냈다.

 


 ‘울창한 밤나무 아래, 나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

 


 이 노래의 가사에 정확히 들어 맞는 윈스턴과 줄리아의 재회도 윈스턴만의 처절함의 잔혹한 대가를 보여주기에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필자는 <1984>의 배경이 우리 현실에 들어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자율성’이라는 무시못할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멋진 신세계’의 배경이 필자에게는 더욱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문학성 그 차제만 보자면 <1984>가 더 감명깊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 속에 담긴 슬픔과 회한, 그리고 처절함을 극한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상 조지 오웰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그의 필력을 엿 볼수 있었던 조지 오웰의 <1984>였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8. 25. 18:49

불안

 

알랭 드 보통 (소설가) 저 



 요즘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품고 있는 감정은 ‘불안’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말 그대로 ‘자본’의 사회다. 자본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자본의 유무에 따라, 정도에 따라 사람들은 불안을 품게 된다. 아이러니한건 자본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모두 불안 속에 산다는 것 이다. 자본이 많은 사람은 이 자본을 유지할 방법에 관하여, 없는 사람은 이것을 늘릴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며 불안해한다.

 


 불안은 不(아니 불)자를 쓴다. 즉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필자는 불안을 보통 생각보다 긍정적으로 여긴다. 불안이 지니는 ‘삶의 원동력’이라는 측면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필자의 생각과 알랭 드 보통의 생각은 어떻게 비견되는 지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펼쳤다.


 

 알랭 드 보통은 ‘지위’의 정의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지위, 단순히 말하면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위를 나타내는 특정 기준은 변화했다. 하지만 높은 지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화하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불안이 시작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높은 지위 = 성공 이라는 명제는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을 갈구한다. 성공 자체를 갈구하는 행동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 및 사회적 원인’ 이라는 요소가 개입됨과 동시에 불안의 씨앗이 발아한다.

 


 이제부터 개인 및 사회적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사랑결핍’.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불안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것 이다.개인적으로 사랑 결핍에 따른 불안은 가장 본능적이고 궁극적인 단계의 불안이라 생각한다. 무시를 두려워하고 사랑을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천성이다. 물질적 관점에 따른 불안도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론 사람들의 관심, 즉 사랑을 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결핍에 따른 불안을 가장 짧게 서술했다. 그러나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다.

 


 ‘속물근성’. 속물근성도 사랑결핍과 비슷한 맥락이다. 속물근성은 말 그대로 속물근성이다.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들을 좋게 보고 그들과 친해지려고 하는 근성, 그 반대의 사람들을 반대로 대하는 근성. 과거보다 현재가 이러한 속물근성이 더 심화됐다는 게 이 챕터의 요지다. 이 챕터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기대’. 우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살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진보를 이룬 오늘 날,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는 불안과 동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꽤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불안은 자존감 하락에서도 올 수 있다. 자존감은 기대와 관련이 있다. 자존감 = 기대/한 일 이기 때문이다. 즉 기대를 낮추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고 불안을 낮출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된다. 자존감-기대의 관계가발전해서 불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러한 알랭 드 보통의 관점은 굉장히 신선했다.

 

 

 ‘능력주의’. 능력주의도 기대, 속물근성과 비슷한 맥락이므로 한 문장을 인용하며 마무리 하겠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불확실성’. 현재에 사는 우리가 불안에 떠는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이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별다른 언급 없이 지나가겠다.

 


 다음은 해결책들 이다.


 

 ‘철학’. 철학자는 이성, 양심을 강조했다. 자신만의 기준을 정립하여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굴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줄 잣대를 세우라는 것 이다. 즉 ‘기준 적용’이 철학이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철학에서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파트는 ‘지적인 염세주의’다. 필자가 살면서 추구하는, 필자만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파트를 읽을 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되었던 말 몇 개를 적어보겠다. ‘상포르’의 말, “여론은 모든 의견 가운데 최악의 의견이다.” 그리고 지적인 염세주의의 약점, 과도하면 친구가 없어 질 것이다.


 

 ‘예술’. 예술은 예전부터 확실히 불안을 덜어줄 수 있는 처방전 중 하나라 생각해왔다. 예술은 우리 현실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요소는 비극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비극은 말 그대로 비극적 내용을 다룬다. 우리가 불안으로 인해 맞을 수 있는 수많은 비극적인 결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안의 결과를 미리 접함에 따라, 불안이 안겨줄 수 있는 무서움에 대한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게 된다.


희극은 비극과 다른 방식으로 불안을 덜어준다. 바로 ‘풍자’다. 풍자를 통해 불안을 가중시키는 개인이나 사회에 통쾌한 ‘엿’을 먹인다. 이 엿을 통해 우리는 내제된 불안을 덜어내는 효과를 얻는다.



 ‘정치’. 정치는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해결책이다. 지위에서 오는 불안을, 지위를 상승시키는 방법으로, 즉 불안의 핵심을 건드려 불안을 더는 해결책이다. 지위에서 오는 불안을, 지위를 상식시키는 방법으로, 즉 불안의 핵심을 건드려 불안을 더는 해결책이다. 이 파트는 광범위하므로.. 이 글에선 패스하겠다.

 


 '기독교'. 통칭해서 종교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비록 무교이자, 종교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하는 필자지만 종교의 장점 중 하나는 줄곧 인정해 왔다. 바로 종교를 통해 죽음에 대한 불안을 덜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종교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알랭 드 보통 또한 이 같은 관점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에 관해 논한다. 또한 관련해 흥미로운 옛 사람들의 관점도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것, 뭣 하러 잠시뿐인 지위에 목을 매고 불안을 촉진시키냐는 관점이었다. 과거 수많은 예술가도 이 관점에 동의하며 자신들의 작품에 이런 관점을 담았다. 이 관점은 분명 흥미롭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 죽음에 상관 말고 자기 끌리는 대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보헤미아’. 처음 전문적으로 접한 보헤미안들은 멋있었고 화려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용어를 빌리자면, 영혼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 너무, 과하게 이를 추구해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헤미아는 물질적 수단을 통한 지위보다는 정신적 성숙을 추구했다. 관련 지위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고 위계를 설계했다.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대안 지위를 마련했다. 불안을 덜기 위해 삶의 방향까지 바꾸는, 대범하고도 매력적인 불안의 해결책 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개인감정에 치우친 서술을 주로 선보였다. 사랑 3부작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더 사회 감정에 치우친 서술을 선보였다. (‘불안’은 개인감정의 한 종류이지만,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감정이기 때문에 사회 감정이라 생각했다.) 사회 감정을 다루는 알랭 드 보통?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낯섦이 더해지니 더욱 인상적이었다. 왜 ‘불안’이 알랭 드 보통 대표작으로 손꼽히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