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016. 11. 1. 20:45

미움받을 용기



고가 후미타케(작가), 기시미 이치로(작가) 저  

 

 

장면 1. 필자가 근무 중 한 병사가 책을 들고 휴가에서 복귀했다. 무슨 책이냐고 물어봤다. ‘미움 받을 용기’ 이었다. 자기개발서인데 꽤 재미있다고 했다.


 

장면 2. 휴가를 나갔을 때, 늘 그렇듯 서점을 갔다. 서점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한 Best seller 코너. 둘러봤다. 여기서도 ‘미움 받을 용기’가 있었다.


 

장면 3. 복귀 후, 컨테이너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서 직함을 갖고 있는 필자. 반납 처리할 책이 있나 봤다. 정리하다 익숙한 표지의 책이 눈에 밟혔다. 그 책 역시 ‘미움 받을 용기’였다.

 

 

 사실 필자는 자기 개발류의 도서를 안 읽는다. 비논리적,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책도 안 읽으려 했다. 그런데 위의 장면들이 마음에 걸렸다. ‘미움 받을 용기’와 인연이 있는 건가 싶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자마자 결정했다. 누가 빌려가기 전에 ‘미움 받을 용기’의 대출처리를 했다. 혹여나 언급한 자기개발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은 채.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나’ 이었다.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이런 단점들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자기개발서와 차별화를 두려고 한 요소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자기개발서가 범한 오류들을 그대로 답습한 모습이었다. 왜 몇 달간 Best Seller 코너에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우선 이 책은 구조의 차별성을 택했다. 여타 도서들은 단순한 서술 구조를 택한다. 그러나 이 책은 대화 구조를 택했다. 이 구조는 가시적으로 큰 효과를 거뒀다. 일방적인 강의 구조가 아닌 쌍방적인 대화 구조를 책에 구현함으로써 독자들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줬다. 대화 구조만의 신선함도 그들의 집중을 환기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책의 내용도 쉽게 이해하는 듯한 효과도 준다. 이 책에선 ‘청년’이 독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해, 독들의 궁금증을 직접적으로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대화구조는 가시적으로‘만’ 효과를 거두었다. 대화 구조의 이면에는 맹점이 존재한다. 바로 ‘답정너’다. 응? 글의 구조에서 뜬금없이 ‘답정너’(답은 정해져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미움 받을 용기’의 대화에서 질문하는 쪽은 주로 ‘청년’이다. 대답하는 쪽은 ‘철학자’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청년이 독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독자들이 품을 법한 궁금점을 철학자에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눈속임’에 불과하다. 독자의 대변인인 듯 보이나, 결국 작가의 펜 끝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에 불과하다. 즉, 청년은 독자의 대변인이 아닌, 작가의 대변인 역할을 한 것 이다. 철학자는 작가의, 구체적으로는 아들러의 생각을 말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작가의 역할. 결론은 ‘미움 받을 용기’의 대화구조는 작가가 질문하고, 작가가 대답하는 어설픈 답정너 형식을 띠고 있다. 결국 이 대화는 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고, 독자는 이에 휩쓸리게 되는 것 이다. 교묘한 눈속임으로 독자의 거짓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다.

 

 

 ‘미움 받을 용기’는 내용에서도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들러’의 심리학을 차용한 것 이다. 필자 또한 ‘아들러' 란 사람의 이름만 들어봤을 뿐,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따로 접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새로운 무언가를 던져주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책을 읽어보니, 아들러의 심리학이라는 것도 새로운 특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개발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더 극단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공감은 덜 되고 아쉬움만 더 늘어났다.

 


 아들러는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전에 하나의 전제를 깔아둔다.

 

 ‘사회가 있기에 개인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사회가 있기에 개인이 있는 것이다. 즉 사회 속의 개인을 인정하는 것 이다. 아들러는 이 전제에서 출발해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제와 결론이 서로를 부정하는 사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회 속엔 타인이라는 개인, ‘나’라는 개인이 공존한다. 타인들과 ‘나’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되고, 이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게 사회다. 이런 사회를 인정한 아들러인데, 아들러는 결론으로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라 한다.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고민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움 받을 용기’에서 마음을 주는 주체는 ‘나’와 사회를 같이 구성하는 타인들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타인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내어 ‘나’자신을 행복하게 하라? 다른 사회구성원, 타인과의 부조화로 사회유지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아들러의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닌가? 사회속의 개인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사회 해체까지 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내면서 살아가라? 그렇기에 ‘미움 받을 용기’는 비논리적이다.

 


 좋다. ‘미움 받을 용기’를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아들러에 의하면 타인들에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고민들은 다 해결됐을 것 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든다. 과연 행복해질까? 아들러는 행복해진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미움 받을 용기’를 실천해서 오는 행복의 정도보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마음으로 인한 고립의 두려움, 외로움의 정도가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움 받을 용기’는 비현실적이다.


 

 사실 필자는 자기개발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뿐, 그것의 존재가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자기개발서를 읽고 기쁨이나 힘을 얻는다면 자기개발서는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Best seller인 ‘미움 받을 용기’는 자신의 역할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기쁨과 힘을 얻어야 할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 이다. 문득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필자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그리고 여럿 우리들이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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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10. 29. 18:38

벌어야 사는 사람들

 


- 정현영


 

 <벌어야 사는 사람들>. 30·40대 13인이 말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돈 이야기. 지금껏 접한 책 중 가장 자극적이고 적나라한 소개 글이었다. 알 수 없는 끌림이 생겼다. 책을 보는 순간 결재 버튼을 눌렀다.

 

 

 필자에게 돈은 무슨 의미일까.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돈은 삶의 수단이고 목표였다. 그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 정도가 심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야구 명문으로 유명한 학교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연 진학을 했다. 하지만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부상을 안고 있었으나 이미 재활은 거의 끝난 상태. 아버지가 나섰다. 감독과 면담을 했다. 우리 아들 왜 경기에 출전시켜주지 않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황당했다. 돈을 달라고. 돈을 줘야 출전시켜 주겠다고.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필자는 야구를 관둔다 했다. 우리 집안은 이미 필자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진 상태였다. 더 이상 피해주기 싫었다. 결국 일반고로 전학을 갔다.

 


 이 일은 돈에 대한 갈증을 증가시킨 계기가 됐다. 그 후로 맹목적으로 돈을 좇기 시작했다. 돈을 위해 어린 나이에 방송국에 들어갔다. 과외도 병행했다. 학비충당을 위해 퇴근 후 밤샘공부를 하며 장학금까지 탔다.

 

 

 <벌어야 사는 사람들>에선 다양한 직종·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제약회사의 월급쟁이나 소방관, 항공기 정비사부터 애널리스트, 각 회사 CEO, 금융업 종사자까지. 각기 다른 인생을 산 만큼 돈에 대한 태도로 다를 것이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돈의 중요성에 대해선 뜻을 같이 했으나 돈의 관점에선 의견을 달리했다. 돈이란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꾸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도 20대에는 필자와 같았다. 돈 버는 방법만 상이했을 뿐 맹목적으로 돈을 좇았다. 그러나 여유가 생기니 지난날을 돌아보며 돈에 대한 관점을 바꿨다. 이젠 자유를 찾고 싶다고. 돈 만을 위해 살아왔던 인생을 반추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필자가 앞에서 정의한 돈의 의미 중 삶의 목표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자본과 결탁한 이 사회에서 돈이 그저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비극의 주인공인 우리. 이 비극을 희극으로 반전시키는 게, 즉 돈으로부터의 자유를 안겨주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돈이라는 생각. 돈으로 빚어진 비극이 돈으로 인해 희극으로 재탄생하는 게 결국 자본주의 속 벌어야 사는 우리라는 결론을 내려 봤다.

 

 

 이 책의 인터뷰어 정현영 기자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상상하면서 ~ 웃어 보이는 것이 벌어야 사는 시대의 천국이 아닐까.’

 


 <벌어야 사는 사람들>는 소개 글과는 다르게 13인의 돈에 관한 인생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비록 소개 글만큼이나 노골적인 돈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돈 그 자체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줬다. 왜 우리는 벌어야 사는 사람들일까. 우리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등등.

 

 

 돈에 관한 현실적인 고찰을 통해 돈이 지닌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고마운 책, 정현영 기자의 <벌어야 사는 사람들>이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10. 22. 18:08

끌림

 


이병률


 

  군대의 도서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더구나 필자 부대의 도서관은 단출한 컨테이너.. 책을 보기 위해 아쉬운 대로 컨테이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볼만한 책이 많았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눈에 띈 책 ‘끌림’. 과거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한 번 접했던 책이었다. 그때의 추억에 빠져볼까 싶어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끌림’ 여행에 수많은 끌림을 느끼는 작가 이병률이 쓴 책이다. 여행? 기행문? ‘뻔한 전개를 가지고 있겠지.. ’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끌림은 달랐다.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랄까? 비스 무리한 기법으로 책이 쓰였다. 여행 중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평소 자신이 살면서 느낀 바를 이야기하고 타국 여행자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여타 기행문과 달리 이야기 주제의 폭이 넓다.

 


 주제의 폭이 넓은 기행문. 꽤나 신선했다. 이로 인해 필자는 진기한 간접체험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르인 기행문이지만, 주제의 다양성 때문에 책에 붙은 흥미를 안 떼고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단점 또한 존재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기행문 특성이기도 하지만, 끌림은 이 단점이 두드러졌다.

 


 작가의 평소 가치관 및 세계관을 알 수 있었다. 여행 중 담백한 담화와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횡설수설했다. 끌림에 대한 간단한 평가다.

 


 이제 이병률 작가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사실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이병률 작가의 삶 이었다. 서평에서 작가 신경숙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돌아오자마자 떠날 준비를 하는 병률’

 


 여행이 삶인 병률이다. 흔히 일컬어지는 갓수저인가? 부러운 삶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만난 짧고도 돌이킬 수 없는 인연들을 만난점도 부러웠다. 여행으로 인해 얻어진 그의 소중한 자산들, 그리고 경험들 그 자체 모두가 부러웠다.

 


 병률의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끌림에서 나타나는 병률은 본능적이다. 그리고 풍부하다. 그래서 알 수 없다. 병률은 정말 다양한 국가를 갔다 왔다. 각 나라에서 느낀 그의 감정은 풍부했다. 그 예가 병률이 느낀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각 나라마다 달랐다. 어쩔 때는 간절함의 존재, 어쩔 때는 허탈함의 존재였다. 그래서 병률의 글이 횡설수설하고 정제되지 않았나 보다. 병률만의 감성과 몰입이 짙게 배였기에 나타난 결과물인 듯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끌림은 기행문이다. 다른 책 들 보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병률의 사진들을 보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어루만졌고 병률의 생각을 읽으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전에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접했을 때 보다 더 크게 와 닿았다. 군대라는 환경 때문인가..? 어찌됐든 책은 한 번 읽어서는 안 되는 것 이라는 걸 재확인 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10. 8. 18:47

영화 이론과 연출 (뤼미에르에서 미국드라마까지)



김태희 저



 

1. 영화서평 쓴 다는 놈이 막상 영화에 대해 아는 전문적인 지식은 거의 없었다. 항상 비슷한 내용으로 일관하는 필자의 서평을 보면서 전문적 지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골랐다. <영화 이론과 연출>. 거창해 보이는 제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얇은 책 두께.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제부터 이 책에 대해, 요약의 방식으로 얘기해 보겠다.


 

2. 과거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국은 ‘필름-다르’를 앞세워 예술적 사조로서의 영화관을 구축했다. 반면 미국은 일찍이 영화를 상업적 수단으로 여겼다.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를 내세우며 영화의 상업화를 이끌었다.


 

3. 무성영화시대. 이 시대의 영화는 연극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소리가 안 나오니 여러 연극적 요소를 차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탓이 컸다. 과장된 몸짓, 표정연기, 카메라 정면 숏 등이 이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국가의 탄생>을 만든 그리피스나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 등 역사적인 감독들이 탄생했다. 이들의 활약엔 힘입어 미장센, 카메라 기술 등의 여러 영화적 기법이 발달했다.



4. 유성영화시대. 드디어 영화에도 ‘소리’가 도입됐다. 세계 최초의 유성영화라 평가 받는 <재즈싱어>는 대흥행에 성공함으로서 유성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방증했다. 유성영화의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평가, 연극이 영화보다 우월하다! 라는 인식은 차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5.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1945년 전후, 이탈리아의 영화계는 파시즘의 영향으로 쇠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젊은 감독들을 축으로 이 파시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프랑스 인민 전선의 영향을 받은 네오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 성향을 띠었다. 또한, 사실주의적, 풍자적 성격을 드러냈고, 주로 하층민의 삶을 다뤘다. 네오리얼리즘은 이를 주도한 대표적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사실들이 거기 있는데, 뭐 하러 그것들을 조작하는가.”


 

6. 일본의 근대영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전성기가 시작된다. 우리 일상의 문제를 정제된, 정적인 이미지로 풀이한 담담한 영화들이 대세를 이뤘다. 이 영화들은 일상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7. 누벨바그. 전쟁 후 프랑스 영화계는 상업화가 가속되었다. 시나리오 중심의 상업적 영화가 주를 이뤘고 그 결과 영화감독들의 역량이 중요치 않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항해 젊은 감독들이 발 벗고 나섰다. 그 중심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와 앙드레 바쟁이 있었다. 앙드레 바쟁이 만든 카이에 뒤 시네마는 누벨바그의 성지 역할을 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프랑스의 어떤 경향’ 이라는 글을 개제해 ‘작가들의 영화’들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누벨바그의 테마 ‘작가 정책’으로 발전했다. 작가 정책이란 영화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뜻한다.

 


8. 누벨바그는 어떻게 젊은 자유를 표현할 것인가! 에 대해 많은 고심을 했다 또한 로베르 브레송, 알프레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들이 누벨바그의 주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치밀한 미장센으로, 잉마르 베리만은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스크린 속 배우 등의 획기적 시도로 누벨바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즉 그들은 창조적 시도와 관객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것이다. 실제로 누벨바그의 대표적 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뤽 고다르는 여러 실험적 요소를 시도했고 일반적인 영화 문법을 거스르는 파격적인 시도로 누벨바그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누벨바그는 TV의 대중적 보급, 누벨바그 소송 등으로 피해를 입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누벨바그는 상업성 보다 예술성을 추구한 하나의 새로운 물결 (New Wave) 이었으므로, 또한 영화를 하나의 의사표현의 도구로 발전시켰으므로 그 존재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9. 그 이후에는 친숙한, 비교적 현대의 이야기이므로 생략하겠다.

 


10. 이 책을 다 읽고 느낀 점. <영화 이론과 연출>이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사에 치중한 모습이었다. 또한 책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서인지 다소 한정적인 내용만을 다뤘다.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귀로만 접했던 영화의 과거를 눈으로 접하게 되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상 김태희 교수의 <영화 이론과 연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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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10. 2. 19:42

<쓺 : 문학의 이름으로>


 

- 문학실험실

 

 

 문학에는 모순적인 매력이 있다. 현실을 토대로 만든 것이 문학이다. 하지만 현실과는 또 다른 층위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문학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랑했다. 문학에는 순수한 매력도 있다. 그저 작가의 상상력에만 기대어 창작되는 것이 문학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랑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사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이었다.

 


 필자는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과거 본인이 접했던 작품을 무의식적으로 흘려 쓰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문학에 대한 필자의 사랑도 견고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표절사건 이후의 사태를 보고 필자는 문학에게 좌절했다.

 

 

 신경숙은 솔직하지 못했다. 각종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했다. 비단 신경숙 뿐만이 아니었다. 이 사건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출판사 또한 침묵을 지켰다. 문학에 종사하는 작가들도 그 어떤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 침묵도 오래가지 못했다. 순수함으로 대변되는 문학에서도 모종의 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종의 자본들과 결탁했다. 일명 문학자본이다. 그 과정에서 문학 권력을 창조했다. 문단 권력을 창조했다. 우리를 위한 문학이 아닌 그들을 위한 문학이 됐다. 필자는 문학에게 좌절했다.

 

 

 필자는 어리석었다. 문학의 異常(이상)을 감지하지 못한 필자의 불찰이었다. 이미 문학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학에선 과거의 순수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극적인 활자가 난립했다. 변혁을 두려워하는 퇴행적 행보를 보였다. 문학상업주의에 굴복한 모습이었다. 필자는 또 한 번 문학에게 좌절했다.

 

 

 그 때 ‘문학실험실’이란 단체를 알게 됐다. 그들이 제작하는 문학전문지 <쓺 : 문학의 이름으로>를 읽게 됐다. 그저 좋았다. 기존 문학이 저지를 과오를 성찰하고 한국 문학의 존재이유를 추구해나간다는 그들의 자세가 그저 좋았다. 결심했다. 필자도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주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정기 후원을 하기로. 그럼으로써 미약하게나마 태동하는 한국 문학의 본질을 믿어보기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문학, 한국 문학을 사랑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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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10. 1. 18:59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The Course of Love’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여친이 보낸 메시지의 전문이다. 사랑의 과정? 오랫동안 사귀어온 관계. 그렇기에 지극히 쿨한 관계. 이런 관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답장을 보냈다. ‘뭔 x소리?’ 답장이 왔다. ‘The Course of Love' 똑같은 답장이었다. 대화가 진전될 기미가 안보였다. 읽씹했다. 몇 분 후, 여친한테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알랭 드 보통이 새 책을 냈다고 한다. ‘The Course of Love'는 그 책의 제목이었다. 닥터 러브가 새 책을 냈다고? 그것도 소설? 온라인 서점으로 들어가 바로 결재버튼을 눌렀다.

 

 

 알랭 드 보통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을 통해 낭만적 연애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마음껏 뽐냈다. 필자는 알랭 드 보통 만의 깊은 통찰에 감탄하며 이 시리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편엔 아쉬운 점도 있었다. 보통의 ‘연애’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 필자가 하고 있는 장기간 연애나 결혼까지 발전한 특별한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The Course of Love’에서 항상 사랑의 초중반에만 통찰한 알랭 드 보통 이었다.

 

 

 하지만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The Course of Love’ 중 사랑의 후반부에 집중한 소설이었다. 즉 그 후의 일상에 관심을 둔, 필자의 기대를 충족시킨 소설이었다. 그래서인가?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보다 더 흥미롭게 읽었다.

 

 

 언젠가 여친한테 물었다. 결혼이란 현실이 다가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여친은 대답했다. 결혼은 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이라고. 사랑을 결혼이란 이름에 가둔다고 사랑의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오히려 결혼이라는 의식은 우리의 사랑을 더 공고히 다져줄 것이라고. 이상주의자인 그녀였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녀와 상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필자. 곧바로 반문했다. 결혼은 일상의 공유를 뜻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몰랐던 혹은 지금의 연애관계에선 알 수 없었던 두려움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는 보통의 커플이 아니다! 자그마치 8년을 같이 한 커플이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다! 아까도 말했듯이 결론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특별한 커플이기에 결혼을 해도 특별할 것이다! 오글거렸다. 하지만 기특했다. 그리고 설득 당했다. 우리 둘은 결혼해도 타(他) 커플들과는 다른 특별한 부부로 남겠지. 일상이 개입한다 하더라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특별한 커플.

 

 

 이러한 믿음을 되뇌고 이 책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책을 다 읽어갈수록 이 믿음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결혼에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있다는 걸 필자와 여친은 모르고 있었다. 집안일이라는 변수, 아이들이라는 변수, 외도라는 변수, 중년의 나이라는 변수 등등. 낭만적 연애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일상’의 변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혼이란 행위는 낭만주의가 아닌 현실주의로 변색되고 있었다. 사랑이란 감정은 일상에 매몰되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이 정의한 결혼의 의미가 일견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알랭 드 보통의 결혼에 대한 일상적 통찰은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에서 정점을 찍는다. 겉으로는 편리하게도 단일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 수많은 진전, 단절, 재협상, 소원한 기간, 감정적 회귀가 깔려있어 단 한사람과 사실상 열두 번의 이혼과 재혼을 겪은 라비.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주인공 라비. 그로 인해 보다 성숙해진 라비. 그래서 낭만을 넘어 결혼이란 현실에 순응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라비와 커스틴.

 

 

 책을 읽기 전 되뇌였던 믿음은 이미 가루가 된지 오래였다. 그 자리는 결혼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믿음을 산산조각 낸 알랭 드 보통에 대한 경외 섞인 원망과 함께한 채.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다 읽은 후 다시 한 번 여친한테 물었다. 결혼이란 현실이 다가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까? 여친은 대답했다. ‘The Course of Love... ㅠㅠ.’ 사랑에 대한 집요하고도 능숙한 통찰로 독자를 이래저래 미치게 만드는 이 시대 최고의 일상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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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9. 29. 20:46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입대 전에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 책을 읽기가 귀찮았다. 책 이란게 굳이 찾아서 읽을 만큼의, 필자의 ‘시간’을 포기하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와보니, 자대에 와보니, 생각은 달라졌다. 주위에 있는 것은 ‘시간’ 뿐 이었다. 사회에선 부족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군대에선 풍족한 시간 때문에 고민했다. 시간을 어떻게 쓸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책’이었다. 이 답이 나오게 된 경로는 의외로 간단했다. 선임들의 관물대를 살펴보니 누구나 한 권쯤 다 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수동적 독서에만 익숙했다. 책을 고르기가 막막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선 관심사를 살펴봤다. 고등학생 때, 필자는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좋아했다. 철학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는 과목이었다. 이번엔 더 깊게 배우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 이후로 관심사가 줄줄이 나왔다. 조금 더 현대적인 책이었으면 좋겠고, 위트 있는 책 이었으면 좋겠고, 인문학에 대한 갈증도 있었으므로 인문학 관련 소재의 책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필자의 관심을 종합해 봤을 때 딱 맞는 작가가 있었다. 그 작가는 바로 알랭 드 보통 이었다.

 


 예전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알랭 드 보통의 매력은 공감유도 능력이다. 책을 읽을 때 마다 감탄할 정도다. 필자의 일기장을 보는 듯 한 느낌이랄까? 이 능력은 알랭 드 보통의 사랑 3저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 중 특히 이 작품,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 작품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는 반대의 시점이다. 여자 주인공인 엘리스의 관점, 즉 여자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남자인 필자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소재였다. 궁금점 또한 쏟아졌다. 연애, 사랑에 있어서 여자가 느끼는 남자란? 이 상황에서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등과 같은 흔한 궁금점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아니 엘리스의 배경을 설명하는 첫 챕터부터 ‘엘리스 = 필자’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상대적으로 자존감이 없는 모습,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습 등. 필자가 책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덕분에 필자가 에릭과 연애, 사랑하는 상황으로 여기고 엄청난 몰입감과 함께 이 책과 함께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첫째는 “사랑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이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수많은 부부들이 탄생했을까? 부부란 결혼한 사이를 뜻한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법적으로 인연을 맺는 의식이다. 즉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들을 만나서 결혼을 했냐는 것 이다. 이 질문의 답을 알랭 드 보통이 해줬다.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했기에 결혼을 한 것이다. 모순적인 말 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순 속에 공감이 피어났다. 인간들의 근원적 감정인 ‘외로움’. 이 외로움의 특별한 치유제, 사랑.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나눈 대상을 갈구하게 됐고, 이 사랑이 발전해 연애, 그리고 결혼이 된 것이다. 



  이 결론을 얻고, 돈오를 얻은 마냥 필자는 속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 생각이 필자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 필자의 여친도 사랑을 사랑해서 만나고 있는 것 인가?"

 


 두 번째 인상 깊었던 것은 이상형의 변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상형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그때의 자신의 니즈가 다르고, 욕구가 다르고, 이상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전 애인이 새로운 이상형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 연인들이 결별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성격차이’ 일 것이다. 성격차이. 상호간에 성격이 안 맞아서 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이상형은 저절로 자신의 성격에 맞춘 사람으로 변할 것 이다. 그 전 애인과는 다른 성향의 이상형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엘리스의 이상형 변천을 표로 나타낸 부분이 있었다. 이를 보니 사람들의 이상형 변화에 대한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예전 평론에서 밝혔다시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필자에게 굉장한 공감을 안겨줬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책도 거의 5페이지에 가까운 필사 분량을 차지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보다 더 훌륭한 책 이라 생각한다. 공감을 넘어 일종의 ‘선각’을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 여친, 연애 그리고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많은 것을 숙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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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9. 28. 12:54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 309동 1201호

 

 

 보통 휴가와 마찬가지로 휴가 첫 날, 알라딘 중고서점을 들렸다. 볼 만한 책 뭐 없을까 하다가 눈에 띠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 한 때 SNS에서 구독하던 페이지였다. 하지만 SNS를 찾는 발걸음이 줄어들면서 그에 관한 소식도 더 이상 접하지 못하게 됐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시간강사 생활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필자는 지방시를 구입해 오랜만에 그를 만나보기로 결심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구입한 지방시.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반가웠던 마음은 불편한 마음으로 변해갔다. 근래 읽었던 책 중 가장 읽기 거북했던 책이었다. 시간강사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학의 사회구조와 시간강사의 길을 택한 저자의 가치관이 문제였다.

 

 

 상아탑이라 불리며 학문의 정점을 유지했던 대학.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은 그 성격을 잃었다. 아니, 자발적으로 버렸다. 대학은 자본에 종속된 하나의 기업으로 변모했다. 기업의 성격은 대학 곳곳에 퍼졌다. 대학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원은 학문의 정진을 위해 힘쓰는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에게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철저한 노예의 인생을 강제했다.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야…….’ 관습이란 이름 아래 그들은 노예생활을 강요받았다. 저자 역시 이러한 관습의 피해자였다. 노예생활을 버티고 나서도 대학은 그에게 온정을 베풀지 않았다. 고학력 알바 개념인 시간강사 삶은 그에게 4대보험 가입도, 생계 보장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저자는 4대보험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맥도날드 알바를 병행했다.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저자의 삶, 그리고 본질을 놓아버린 대학의 사회구조 였다.

 

 

 필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인 비단 대학의 사회구조뿐만이 아니었다. 시간강사의 삶을 택한 저자의 가치관 또한 필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저자의 가치관은 시간강사라는 삶과 어울리지 않았다. 인문학을 향한 이상을 갖고 있던, 상아탑이라 불리던 대학에 호응할 듯 한 그의 가치관은 신자유주의 논리를 마주친, 취업사관학교로 변질된 대학에 맞는 조각이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소적인 가치관의 필자와 대비되는 저자의 가치관은 불편함을 넘어 안타깝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지방시를 발표하고 저자는 내부고발자로 찍혀 시간강사의 생활을 접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태는 저자가 지방시를 집필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예견했을 거라 생각한다. 다소 비극적인 결과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지방시와 이 글을 관통하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서. 지방시 저자가 불편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아닌 궁극적으로 대학이라는 사회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내부고발을 통해 대학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후배들에게 좀 더 편한 대학원 생활을 만들어주고픈 선배의 바람. 자신의 희생을 통해 대학이란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고자 했던 멋진 행동가, 309동 1201호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였다.

 

 

 ps. 담담하게 고백하는 듯 한 그의 문체는 감정적인 호소 면에서 높은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단순히 내부고발에 그쳤다는 점에선 아쉬웠다.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 등을 제시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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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9. 26. 12:50

위키리크스 - 마침내 드러나는 위험한 진실



 

 

 


 

 위키리크스의 등장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폭로 전문 사이트’라 자칭한 위키리크스는 율리우스베어 은행과 같은 경제적 분야에서부터 사이언톨로지와 같은 종교, 나아가 미국의 비열한 전쟁모습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 폭로로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도 본국 관련 문서가 폭로되자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뜨거운 감자였던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식은 감자가 되었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의 사생활 문제를 비롯해 그에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이 위키리크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영향력’을 보여준 위키리크스. 그들이 무력해진 계기와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위키리크스 쇠락의 가장 큰 원인은 ‘설립자’ 이자 1인자 줄리언이다.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 그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자자했다. 폭로라는 강력한 무기를 통해 전 세계와의 전쟁을 선포한 줄리언. 사회 이슈에 무지했던 고등학생이었던 필자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모든 악과 맞서는 한 명의 Super Hero 같았다. 하지만 ‘Like Super Hero’의 줄리언은 위키리크스의 근간을 흔들기 시작했다. 위키리크스의 궁극적 목적은 폭로를 통한 공익 실현. 하지만 줄리언은 폭로를 통한 사익 실현을 추구했다. 줄리언은 ‘위키리크스=나’ 라는 논리를 펼치며 위키리크스의 사유화를 시도했다. 위키리크스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의 기부금 또한 자신을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위키리크스는 자본, 권력에 영향 받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언론은 꿈꿨다. 그러나 줄리언의 탐욕은 그들에게 잠식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줄리언의 모습은 언론의 본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립성’의 결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자신들의 역할에 몰두한 나머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됐다. 위키리크스는 폭로 과정에서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위키리크스의 폭로 구조를 살펴보자. 우선 제보자가 위키리크스 게시판에 폭로할 내용을 게시한다. 그러면 위키리크스는 그 자료를 편집 및 종합하여 대중들에게 공개한다. 그 후 대중이 접하는 구조다. 즉 제보자 - 위키리크스 - 대중의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다. 폭로 과정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역할이 뚜렷하게 나뉘어져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구성원들의 역할이 제한되기도 한다. 특히 제보자 - 위키리크스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이 관계에서 제보자는 위키리크스에게 제보를 건네주는 역할 ‘만’한다. 처음에, 이 시스템은 원활하게 작동되어 위키리크스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문제들이 나타났다. 우선 제보의 양을 위키리크스가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위키리크스는 기존의 ‘폭로’역할 말고도 언론의 자유국 만들기 등 다량의 일에 참여하고 관여했다. 결과적으로 위키리크스는 본연의 업무도 수행하지 못하고 부차적 업무도 수행하지 못했다. 과유불급이다. 보안 문제도 발생했다. 이 책의 저자 다니엘에게 문제가 있었다. 자신들을 숨기려한 나머지, 아니 자신들‘만’ 숨기려고 한 나머지 제보자의 익명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그 예가 브래들리 매닝 체포 사건이다. 더불어 제보자에게 어떠한 보상도 해주지 못했다. 책의 구절을 인용하지면 제보자는 ‘명성을 얻어야 할 사람이자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폭로를 결심한 자’들 이다. 하지만 모든 보상은 위키리크스가 독점하고 제보자들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위키리크스는 제보자의 역할을 폭로 제보로 제한하고 이후에는 이용가치가 없다 판단하여 그들을 배제했다. 쉽게 말해, 제보자를 자신들의 사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 이다.

 


 위키리크스는 인간의 알 권리를 제창하며 세상에 모든 비밀을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폭로를 기획 및 실행했다. 좋다.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인간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었으니까. E한 모든 비밀을 없애므로 사람들, 대중들과의 평등성을 지향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는 한 번 더 오버했다. 최후의 심판 파일이 문제를 일으켰다. 최후의 심판 파일은 자신들이 위기에 몰렸을 때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파일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중들 간의 평등성을 지향한다는 위키리크스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최후의 심판 파일을 배포했다. 다니엘은 최후의 심판 파일이 나아가 ‘정치적 지렛대’를 가질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최후의 심판 파일은 그들의 의도와 정반대의 역할을 했다. 최후의 심판 파일은 위키리크스의 권력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그들을 지켜주는 하나의 무기가 된 것 이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지렛대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 파일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악용해 대중 위에 군림하려는 역할만 했다.

 


 위키리크스는 등장 당시 가히 혁명이라 일컬어 질 정도로 화려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권력 속에 가져져 있던 폭로들이 수면 위로 비상했고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덕분에 줄리언 어산지는 일약 스타로 발돋움 했다. 하지만 유명세와 명성에 취한 위키리크스는 자신들의 설립 목적을 잊고 나락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자본에 휘둘리고, 제보자를 수단화 했다. 언론인이라는 사람들이 정보의 비대칭성을 악용하기 까지 했다. 그 밖에 아이슬란드에서의 활동, 줄리언의 폭주 등이 문제가 됐다. 이런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하고 보다 건실한 언론이 되기 위해 나선 것이 이 책의 저자, 다니엘의 오픈리크스다. 말 그대로 모든 걸 공개하고 공유하겠다는 것 이다. 아직은 위키리크스만큼 대중적이지 못하고 애매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의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다니엘이 어떻게 이끌어갈지 기대가 되는 언론이기도 하다. 과연 오픈 리크스가 위키리크스의 본질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9. 25. 13:28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철학자) 저 



 

 파릇파릇한 대학교 1학년 시절, 필자는 문학에 취해있었다.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매력에 끌렸었다. 그래서 교양도 문학 관련 수업으로 올인 했다. 인도문학, 영미문학, 고대문학, 중세문학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문학 강좌를 수강했다.

 


 여러 문학들을 접하면서, 문학 종류에 있어서도 필자의 기호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서양, 현대 문학이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평소 현실주의, 극단적으로는 냉소주의, 염세주의와도 가까이하는 필자의 가치관과 맥락을 같이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소개할 ‘일방통행로’와 작가 ‘발터 벤야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발터 벤야민이라는 작가를 소개 해 준 교수는 벤야민을 이와 같이 평가했다.

 


“20세기 최고의 사유가.”


 

 교수의 수업을 듣던 중, 이 말을 들었을 때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그의 ‘기술복제’ 이론은 독창성 있고 혁신적인 이론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최고’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엔 뭔가 아쉽지 않나? 종강 후 교수에게 이러한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자신의 평가에 동의할 수 있을 것 이라 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였다.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오프라인에서 구하기 힘들었을 뿐더러 책값도 분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쌌다. 무엇보다 부제목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 얼마나 거창한 내용을 담았기에, 이런 거만한 부제를 붙였던 것 일까? 하지만 책의 첫 문장을 읽고 보니 거만했던 것은 필자였음을 알게 됐다.

 


 ‘지금 삶의 구성은 확신보다는 훨씬 더 사실들의 권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거의 한번도, 단 한 번도 확신의 토대가 되어보지 못한 사실들에 의해.’ 이 책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필자 나름대로 사유해보겠다. 우리네 삶의 구성은 훨씬 더 사실들의 권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훨씬 더 사실들의 권역이란 그 자체로 자명한 ‘진리’를 뜻한다. 의심할 수 없는, 불변의, 건드릴 수 없는 그 ‘진리’다. 이 진리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일침을 가한다. 아니, 진리라고 인정하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한다. 과연 이 진리들이 확신의 토대에 올라가 본 적이 있나? 수많은 진리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데 우리는 그를 ‘진리’라는 언어에 속아 그것들을 확신의 토대, 즉 확신의 심판대에 올리지 못했다.

 


 발터 벤야민의 10챕터의 구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과 관련된 모든 질문은 우리의 전망을 가리고 있는 나뭇잎들처럼 아직 손도 못 댄 채 그대로 뒤에 남아있지 않은가?’에서 다시 한 번 이 사유를 강조한다.

 


 이 문장들을 읽는 순간, 그리고 이 문장에 관해 사유를 하는 순간, 왜 그가 최고의 사유가인지 알게 됐다.

 


다른 문장 몇 개도 소개해 보겠다.



 ‘설득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아이를 만들 능력이 없다.]’



 설득은 타인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바뀌게끔 유도하는 일종의 대화의 기술이다. 하지만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 상대방의 겉만 건드릴 뿐, 속은 건드리지 못한다. 상대방의 가시적인 입장만 변화시킬 뿐, 그의 관념 혹은 관점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 이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설득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본 것 이다.

 


 13번지 챕터의 책-매춘부 비교도 인상 깊었다.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 책은 우리에게 잠을 유발시켜 우리를 침대로 끌어들인다. 매춘부는 성의 욕망을 유발시켜 우리를 챔대로 끌어들인다. ‘책과 매춘부는 많은 후손을 만든다.’ 책은 저자의 추종자들을 만든다. 추종자들은 시대에 관계없이 저자의 이론이나 관점을 이어나간다. 즉 그들은 저자의, 책의 후손이 된다. 매춘부는 말 그대로 많은 후손을 만든다.

 


 로지아 챕터 중 선인장 꽃의 구절을 읽을 때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필자가 여친과 대화 나눌 때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놓았기 때문이다.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말다툼 할 때 애인이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면 기뻐한다.’

 


 이 밖에도 필자의 사유를 자극시킨 챕터, 구절들이 많았다. ‘마차 세 대 까지 주차 가능’에선 성매매를 날카롭고, 우호적인 방식으로 비판했다. ‘사무용품’에선 사장들의 숨겨진 위엄,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장치들을 보여줬다. '세금상담‘,’카이저 파노라마 관‘에선 물질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섬뜩한 비유를 통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필자는 글의 서두에서 이 책의 분량이 적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군대에서 읽은 책 중, 실질적인 도움은 가장 많이 되는 책 이었다. 철학과 사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건설적인 책 이었다.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 거만한 부제가 아닌, 일방통행로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부제였다. ‘20세기 최고의 사유가’라는 칭호 또한 발터 벤야민에게 단 1%도 아깝지 않은, 그의 능력에 걸 맞는 최고의 칭호였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