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2016. 9. 6. 19:17

씨 표류기


 

감독 이해준

 


 <김씨 표류기>를 보기 전,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첫 인상. 첫째, 포스터가 완전 아니었다. 둘째, 제목마저도 아니었다. 셋째, 남주에 비해 여주의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졌다. 넷째, 당이 신인급 경력이었던 이해준 감독에 대한 의문부호. 한 마디로 최악이었다. 그래도 숨겨진 명작이라 찬사를 받는 영화였기에 군대의 꿀 같은 주말을 이 영화와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김씨 표류기’는 늘어가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강다리에서 자살시도를 하지만 그 마저도 실패해 밤섬에 표류하게 된 Male 김씨. 학창시절 왕따를 당했던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여파로 인해 밖을 나가기 꺼려하는 히키코모리, Female 김씨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씨 표류기’에서 돋보였던 것은 단연 장치의 활용.

  ‘자장면’ 밤섬에 표류 당했을지라도, 이곳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Male 김씨에게 심어준 고마운 소재. 밤섬에 갇힌 male 김씨를 위해 시켜줬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쳐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자장면. 그 자장면, 즉 바깥음식을 실로 오랜만에 접하면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Female 김씨에게 심어준 고마운 소재.

  ‘쓰레기’ Male 김씨에게는 밤섬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현실로 구현시켜 준, 실용적인 역할을 한 소재. Female 김씨에게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버릴 조차 못 하는, 그래서 그녀의 조그마한 방에 가득 쌓여만 가는 그녀의 절망을 상징하는 소재. 

 ‘민방위 훈련’ Male 김씨와 Female 김씨가 자신들이 표류하던 ‘섬’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 그 밖에 철새, 오리배, 옥수수 등 여러 장치를 활용한 극의 전개가 인상 깊었다.



 서두에서 밝혔다시피 필자는 남주에 비해 여주의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다 본 후에도 솔직히 배우 둘 만을 비교하면 이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죽으려고 투신자살을 시도했지만 밤섬에 갇히고, 다시 생존의 욕망이 피어올라 이를 위해 발버둥치는 정재영의 진지한 원맨쇼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동시에 감동까지 선물했다. 정려원에게는 이러한 임펙트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무게감의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이해준 감독은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녀가 녹음한 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연기 외적인 것에서 정려원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에 힘을 실어줬다. 이해준 감독의 섬세한 연출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여럿 발견됐다. 우선 캐릭터들의 설정이 아쉬웠다. 지나치게 캐릭터들의 설정에 집착한 모습이었다. 결국 현실적이지 못한 장면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결국 관객들의 공감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또한 에피소드의 연계성도 아쉬웠다. 절망에 빠진 김씨들이 희망을 가져가고, 그 희망을 현실로 구현하는 일련의 과정이 매끄럽게 연결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줄지어 펼쳐지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 즉 영화 자체의 텍스트에서 아쉬운 점이 많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한 필자의 느낌은.. ‘생각보다 아쉬웠다.’ 영화를 책임지는 남주, 여주의 처지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크게 공감할 수 없었고, 단지 순간의 ‘희망’에만 강조했을 뿐, 그 이후의 이야기가 설명되지 않아서 주제의식 역시도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래도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필자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힐링 된 것을 느낀 것 보면 군대의 투자한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 이상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 였다.

 

 

 

p.s 사실 위에 언급한 아쉬운 점들은 ‘김씨 표류기’의 장점인 장치들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나타난 요소라 생각한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랄까? 캐릭터들의 억지스러운 설정과 무리한 에피소드의 연계가 뒷받침 되지 않았더라면 이해준 감독이 의도한 장치의 활용이 영화에 제대로 융화되지 못했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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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2016. 9. 3. 19:18

멋진 하루 


- 이윤기

 


 영화의 끝을 알리는 전도연의 미소. 그 미소는 스크린을 넘어와 필자의 얼굴에 전이됐다. 엔딩크레딧이 지나갈 때 까지 이 미소는 필자의 얼굴을 떠나지 못했다. 기나긴 여운을 안겨준 전도연의 미소, 그리고 ‘멋진 하루’였다.

 


 ‘멋진 하루’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연인관계였던 하정우와 전도연, 전도연은 연인시절 빌려줬던 돈 35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하정우를 찾아간다. 하정우가 이 350만원을 갚기 위해 전도연과 함께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멋진 하루’의 스토리다.

 


 스토리만 보면 이 영화 자체가 단순하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멋진 하루’는 스토리‘만’ 단순하기 때문이다. ‘멋진 하루’의 매력은 단순함 속 복잡함이었다. 이건 또 무슨 역설적인 소리인가? ‘멋진 하루’를 만든 두 가지의 복잡함, 바로 하정우와 전도연이었다.


 

 하정우. 극 중에서 그는 표면적인 복잡함을 보여줬다. 그의 여자관계였다. 하정우는 전도연에게 빌린 돈 350만원을 갚기 위해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혹은 인연이 있는 여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현금 돌려막기를 통해 350만원을 다 갚는다. 사실상 그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멋진 하루’의 표면적인 스토리를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만나는 여자의 특성에 따라 극 중 흐름이 좌우되고, 극의 에피소드가 구성되고, 극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전도연. 극중에서 그녀는 이면적인 복잡함을 보여줬다. 그녀의 감정선이었다. 극 중에서 전도연의 감정선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정우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감정선과 하정우라는 존재를 통해 느끼고 픈 감정선이었다.

 


 전자는 말 그대로다. 전 애인이었던 그놈(하정우). 돈을 안 갚고, 연락까지 끊은 그 놈. 그 놈을 처음 보면 어떻겠는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겠는가? 전도연은 그 놈을 만나고,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차가움’이라는 감정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극이 흐를수록 전도연의 감정선에 변화가 일어났다. 350만원을 수금하러 다니면서, 그 놈과 과거의 추억을 공유했다. 현재의 떨림도 느꼈다. 하정우라는 존재 그 자체에게 ‘따뜻함’이라는 감정선을 느낀 것이다. 350만원 수금작업이 끝나고 떠나보내면서 짓는 전도연의 미소가 이 ‘따뜻함’을 드러냈다.

 


 후자는 숨겨진 것 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전도연이 하정우라는 존재를 통해 느끼고픈 감정선은 치유, 그리고 사랑이었다. 극 중에서 전도연은 하정우와 헤어졌었다. 하정우의 물질적인 ‘가난’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다른 남자를 만났다. 물질적인 가난과 무관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에게선 감정적인 ‘가난’이 나타났다.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녀의 가슴에는 상처만 남았다. 사랑에 대한 갈증도 남았다. 이 상처와 사랑의 갈증을 치유하기 위해, 찾게 된 대상이 전 애인 하정우였다. 전도연의 이러한 두 개의 감정선은 ‘멋진 하루’의 시작과 끝을 책임 진 복잡함이었다.

 


 ‘멋진 하루’가 필자의 극찬을 받은 것은 이러한 역설적인 매력 뿐 만이 아니었다. ‘멋진 하루’만의 느낌 또한 필자를 사로잡았다.

 


 ‘멋진 하루’의 느낌은 다른 영화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스러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매개체를 활용한 것도 그렇고, 돈을 갚으러 여러 여자들을 쑤시는 하정우의 뻔뻔함도 그렇고, 사랑의 아픔을 잊으러 전 애인을 찾아온 전도연의 쪼잔함도 그렇고……. 한국스러운 정서의 조합으로 빚어낸 ‘멋진 하루’였다.

 


 ‘노팅힐’을 보고 난 후에도 필자는 여운을 느꼈다. 그때의 여운은 황홀의 여운이었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 사이의 사랑의 완생이 황홀을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멋진 하루’의 여운은 미묘하게 달랐다. 이때의 여운은 잔잔함의 여운이었다. 하정우와 전도연의 감정의 부스러기들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미생이 잔잔함을 안겨다 주었다. 언젠가 잔잔함을 느끼고 싶을 때,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찾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9. 2. 18:28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작년 이맘때쯤, <버드맨>이라는 미친 작품으로 필자를 미치게 만들었던 이냐리투 감독. 그가 또 한 번의 미친 짓을 감행했다. 사실 미친 정도로만 따지면 <버드맨>은 <레버넌트>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휴가 타이밍이 엇갈려 이제야 보게 된, 제대로 미친 영화 <레버넌트>다.

 


 스토리는 단순한 얼개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들을 죽인 톰 하디의 복수를 꿈꾸며 죽음에서 돌아오는 디카프리오를 그린 영화다. 즉 부성애에서 비롯된 단순한 복수극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본능’이라는 성질이 결합하면서 단순함은 위대함으로 승화된다.

 


 레버넌트가 소개하는 본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부모의 애(愛)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디카프리오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톰 하디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을 이끌어간다. 이 일념은 자신을 죽음에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극한의 생존 현장에서도 모든 걸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원주민 족장의 딸에 대한 愛도 디카프리오의 愛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생명에 대한 본능이다. 이 본능은 필자가 레버넌트를 보면서, 야나리투를 만나면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요소이기도 하다. 레버넌트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생명’이라는 권능 앞에서 동등해졌다. 문명을 일군 존재라며,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백인들도, 야만하다는 백인들의 평가를 받지만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켜온 원주민들도, 심지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멸시받는 짐승들까지. 그 어떤 생명체라도 생명 앞에서는 동등하다는, 당연하게 여겨져야 할, 하지만 잊히고 있는 진리를 멋지게 표현한 레버넌트였다. 그리고  이냐리투 였다.

 


 레버넌트의 위대함은 단지 스토리에 그치지 않는다. 혹자는 과시라는 단어를 쓰면서까지 폄하하던 기술 또한 레버넌트의 위대함을 대변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대자연. 레버넌트는 대자연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기술적 능력 모두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자연광. 듣기로는 자연광 촬영을 위해 두 개의 세트장을 지어서 촬영했다고 한다. 한 세트장은 오전을, 나머지 세트장은 오후의 대자연을 그리기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노력은 대단한 결과물로 귀결되었다. 광활한 대자연을 가감 없이 보여줬고, 인물들의, 특히 디카프리오의 여기에 ‘광’을 더해주는 역할을 했다.

 


 촬영기술.  이냐리투 감독은 전작 <버드맨>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롱테이크를 선보였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 레버넌트도 기대를 하게 됐다. 결과적으로는 이번에도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첫 번째는 시점.  이냐리투는 그전의 작품들과 달리 레버넌트에선 아래를 추구했다. 카메라의 시점 자체를 대부분 아래로 잡았다. 관객의 시선 또한 아래를 강요받았다. 낯선 시도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보통 영화의 시점은 관객의 눈높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관객을 위한 작은 배려랄까? 이에 익숙했던 필자이기에 레버넌트의 낮은 시점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의 시간이 흐를수록 시종일관 낮은 시점을 고집한 그의 집념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낮은 시점은 필자에게 극한의 몰입감을 안겨줬다. 디카프리오가 물에서 허우적 될 땐 필자도 그 같은 상황에 처한 듯 했다. 디카프리오가 곰과 싸울 때 에도, 말 안에서 잘 때도, 눈밭을 기어 다닐 때도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궁극적으로 대 자연의 가혹함, 험난함, 두려움 아니 경외감을 ‘체험’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테이크. 테이크를 길게 가져간 것 이다. 사실 이는  이냐리투 작품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특성이다. 그만큼 많이 선보인 촬영 기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의 활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버드맨>의 테이크가 자연스러움이라면 레버넌트의 테이크는 긴장감으로 대변된다. 긴장감이 필요한 테이크에는 기다렸다는 듯 긴 테이크가 등장했다. 영화 초반의 전쟁 씬, 중반의 디카프리오 추격씬, 종반의 최후의 결전 씬. 끊김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에서 압도적인 긴장감이 피어났다.

 


 연기. 연기는 뭐.. 필자가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혹자의 말로 이를 대신하겠다.

 


“톰 하디, 디카프리오의 오스카 수상을 미리 축하한다.”

 


 언젠가부터 영화의 중반에 이르면 그 후의 전개가 예상되는 일이 허다했다. 처음에는 이것 또한 영화 보는 눈이 생겼다고 억측하며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따위도 맞출 수 있는 전개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라는 생각 또한 불현 듯 솟아났다. 이런 생각이 무르익을 때 쯤  이냐리투가 나타났다. 보통의 생각들을 뛰어넘는, 영화의 극한을 추구하는 그의 철학, 이를 관철시키는 그의 능력. 극찬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그의 작품이 기다려진다.

 


 이상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 였다.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9. 1. 20:39

해어화

 


 언젠가부터 국내영화를 접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 국내영화 또한 해외의 수작들에 비하면 질이 떨어지겠지?’


 

 영화의 소재가 무엇이든감독이 누구든 항상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오늘 리뷰할 영화해어화도 마찬가지였다. ‘협녀칼의 기억으로 이미 역사극을 선보였던 박흥식 감독의 또 다른 역사극그 전 영화를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안 봤어야 했다멜로와 액션의 언밸런스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협녀였기에..

 


 하지만그래도이 영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천우희라는 배우가 주연으로 함께했기 때문이다천우희가 함께 했으니까 이 영화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겠지!’ 라는굉장히 논리 정연한 기대를 품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겉으로 드러난 헤어화는 세련된 영화였다한복을 입고 있는 한효주와 천우희를 보고 있자니 눈이 호강했고그녀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귀까지 호강했다연기 또한 일품이었다.천우희의 연기는 단연 말할 것도 없었다항상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는 우희누나이니인상 깊었던 것은 한효주의 연기였다그간 선보였던 한효주의 연기를 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무난함이었다항상 무난한 연기력을 선보이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는 배우는 아니라고 단언했다하지만 해어화에서의 한효주는 달랐다선한 마스크를 가진 한효주라 익숙치 않았을 소율 을 강렬하게 소화해냈다.

 


 영화의 겉은 분명 칭찬받을 만 했다박흥식 감독이 협녀에서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구나 여겼다하지만 영화의 속은 겉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우선 감정선. ‘해어화에서 배역들의 감정선은 커다란 질곡을 겪는다한효주와 천우희의 우정을 넘어선 그녀들의 크나큰 욕망이 빚어낸 감정선이 영화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그녀들의 감정선이 더욱 더 섬세하고 정밀하게 드러났어야 했다하지만 해어화는 이들의 감정선을 묘사하는데 너무나 부족했다화면으로 설명해줬어야 할 감정선을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는 불친절을 범했다뚝뚝 끊기는 편집 또한 이에 일조했다.

 


 두 번째는 영화의 흐름이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해어화였던 한효주와 천우희. ‘조선의 마음이었던 한효주와 천우희두 부분이다. ‘해어화였던 전반부는 상당히 안정감 있게 흘러갔다스토리의 기승전결이 단단히 잡혀있는 모습이었다하지만 후반부그녀들이 가수가 된 이후에는 스토리가 요동치기 시작한다극 중 천우희가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시퀀스유연석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시퀀스이 두 시퀀스가 어색하게 느껴졌다후반부 스토리에 융화되지 못하고 혼자 튀는 느낌이 들었다마지막 결말도 아쉬웠다류혜영이 연기한 옥향을 조금 더 활용해보면 어땠을까한효주를 성공한 기성가수로 그렸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그 외 한효주와 천우희에 비해 조금은 오버스럽게 느껴졌던 유연석의 연기비장했던 영화 분위기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스토리의 빈약함 등이 해어화에 대한 아쉬움을 더했다.

 


 결론은 해어화’ 또한 글 서두에서 밝힌 국내영화에 대한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딱 그 퀼리티였다그래도 천우희라는 배우를 다시 한 번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었던 기회라는 점에서 영화 해어화의 의의를 찾아야겠다이상 박흥식 감독의 해어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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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2016. 8. 31. 12:34

아가씨


 - 박찬욱


 


 감독 박찬욱을 거장 박찬욱으로 만들어준 그만의 비기, ‘모호성’이다. 그의 작품들은 신비롭고 신선했다. 신비로움, 그리고 신선함에서 피어나는 모호성은 관객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박찬욱만의 독창적 여성 서사의 시작을 알린 <친절한 금자씨>가 그랬다. 박찬욱에게 칸의 영광을 안겨준 올드보이도 그랬다. 자연스레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의 모호성에도 기대를 품게 됐다. 하지만 <아가씨>의 모호성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를 보여줬다. 박찬욱 감독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다양하게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그것의 적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1. 사랑의 모호성

 

 사랑은 내면에서 우러나온다. 내면에서 발현된 사랑의 감정이 외면적으로 발산될 때 사랑은 비로소 완전함을 이룩한다. 즉, 내면의 감정은 완전한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김태리의 사랑은 이 전제조건에 충실했다. 일본인 귀족이라는 김민희에게 신선함을 느낀다. 신선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억압된 그녀의 삶에 연민을 느낀다. 그녀의 고통을 같이 통감하며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그녀를 보살펴 주고 싶다는 모성으로 발전한다. 느낌의 조화가 김태리의 사랑을 만들었다. 하지만 김민희의 사랑은 김태리의 사랑과 달랐다. 김태리에게 어떻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김민희만의 내면의 사랑이 영화에 표현되지 않았다. 심리적 개연성의 부재가 발생했다.

 

사랑의 불완전한 전제는 필연적으로 사랑의 불완전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랑의 발산 격인 그녀들의 ‘섹스’는 불완전했다. 불완전한 섹스는 사랑의 모호성으로 직결됐다. 그녀들이 원했던 것은 내면의 발현에서 비롯된 완전한 사랑일까. 동물적 접근에 입각한, 원시적 욕구에서 파생된 불완전한 사랑일까. 관객들이 ‘포르노’라는 악의적 표현까지 입에 담으며 <아가씨>를 혹평하는 이유는 이 ‘사랑의 모호성’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사료된다.



2. 스토리와 미장센의 모호성

 

감독 박찬욱의 트레이드마크. 탁월하게 아름다운 그만의 미장센이다. <아가씨>에서는 미장센에 유독 더 신경 쓴 모습이었다. 함께 <올드보이>라는 대작을 만든 류성희 미술감독과 함께했다. 그리고 스타일에 변화를 더했다. 전작들과 달리 조금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였다. 특히 전반적인 영상미가 눈에 띄었다. 김민희의 낭독회 씬, 그리고 김태리와 함께하는 정사씬은 미장센의 대가다운 압도적 장면들이었다. 분명 <아가씨>의 미장센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줬다. 하지만 머리로는 즐길 수가 없었다. 스토리와 미장센 사이의 힘의 분배가 문제였다.


 <아가씨>의 스토리 얼개는 꽤나 신선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 반전의 이해를 돕기 위한 3부작 구조. 박찬욱 작품답지 않은 즐거움과 깔끔한 결론까지. 하지만 얼개를 쌓아가는 과정은 다소 아쉬웠다. 반전에 반전 스토리가 버거웠던 것일까? 스토리 중심의 개연성은 조금씩 떨어졌다. 스토리의 태도에 있어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3부작 中 1부~2부 초중반은 너무나 불친절했다. 2부 종반부터 3부까지는 너무나 친절했다. 스토리에 들어갈 힘을 미장센에 주다보니 미장센이 감독의 과시적인 사족으로 느껴졌다. 스토리와 미장센 분배의 모호성이 빚어낸 사태다.

 

 

3. 주제의 모호성

 

 <아가씨>의 주제는 독보적이다.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완성하는 여성들의 사랑.’ 박찬욱 감독 본인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끌린다고 언급하면서 <아가씨>의 주제를 직접 암시했다. 이 주제는 그간 국내영화에서 볼 수 없는 독보적인 주제였다. 하지만 필자에게 이 주제는 단지 ‘어쩔 수 없는’ 주제였다.

 

 주제의 설득력이 아쉬웠다. 여성들의 주체성을 ‘성(性)’이란 코드로 나타내고 싶었던 것일까. 성을 상징하는 표상들이 즐비했다. 14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동안 이 표상들을 일일이 나열하기에 급급했다. 주제라는 목적과 장치라는 수단이 전치 된 모습이었다. 주제의 설득력을 높이기에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주제의 명확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는 영화 종반부에서 두드러졌다. 영화 종반에는 두 시퀀스가 나온다. 조진웅과 하정우가 함께하는 지하실 시퀀스. 김민희, 김태리가 하는 정사 시퀀스다. 전자는 아가씨, 김민희가 당했던 억압과 폭력을 상징한다. 후자는 여성들의 주체성, 그리고 사랑을 상징한다. 극명히 대비되는 두 시퀀스를 통해 주제의 명확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전자의 시퀀스는 억압과 폭력을 옹호하려는 남성들의 치졸한 변명으로 들렸다. 후자의 시퀀스는 주체성과 사랑이 아닌 ‘몸의 대화’에만, 인간의 근원적 욕구만 충족시키려는 것처럼 들렸다. 주제의 명확성이 아닌 감정의 불쾌함이 앞섰다.

 

 박찬욱 감독의 아쉬운 연출들이 주제의 독보성을 어쩔 수 없는 주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제의 모호성으로 전락시켰다.

 

 

 모호성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어떤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그 개념이 전하는 내용의 범위를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음을 뜻하는 말.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모호성은 본질적으로 양면성을 띠고 있다. 이번 작 <아가씨> 또한 여타 영화들보다 확실히 신비롭고 신선했다. 하지만 기존과 달리 대중적 성격을 가미한 탓일까? 어색한 모호성이 주를 이뤘다. 모호성의 부정적 작용이었다. 감독의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탁월하게 아름답지도 않은, 매혹적이지도 않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였다.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8. 28. 19:05

마션


- 리들리 스캇

 

 

 2013년 작 그레비티를 봤다. 굉장했다. 대단했다. 그 어떤 말로도 평가할 수 없는 영화였다.

2014년 작 인터스텔라를 봤다. 실망했다. 공상과학과 어설픈 가족애의 결합이었다. 그 후 2015년, 또 다른 공상과학영화가 나왔다. 할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 ‘맷 데이먼’이 주연으로 나선 ‘마션’ 이었다.

 


 혹자들은 마션을 보고 이렇게 정의한다. ‘화성판 캐스트 어웨이’ 캐스트 어웨이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럼 마션은 화성에서 마크 위트니 (맷 데이먼 극중 이름) 가 화성에서 살아가는 이야기일까? 맞는 말 이긴 하다. 수백일 동안 화성에서 혼자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션이 ‘화성판 캐스트 어웨이’ 라는 말로 대표 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마션을 어떻게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필자는 마션을 ‘낙천성과 과학이 빚어낸 최고의 인류애’ 라고 정의하고 싶다. 낙천성과 과학? 인류애? 안 어울리는 세 단어의 조합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션은 이 세 단어를 절묘하게 조합해냈다.

 


 마션은 ‘낙천적’이다. 화성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꽤나 끔찍한 이야기인데 낙천적이라고?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묘미가 아닐까 싶다. 우선 주인공 마크 위트니를 살펴보자. 마크 위트니를 보면 과연 이 사람이 화성이라는 광활한 세계에 혼자 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싶다. 미지의 행성에 혼자 있는 상황인데 굉장히 침착하다. 자신의 최악의 상황을 절대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실례로, 화성에서 감자를 심고, 패스파인더를 찾아내고 등등,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낸다. 마션에서의 ‘낙천적’은 마크 위트니의 성격 뿐 만이 아니다. BGM(Back Ground Music) 또한 낙천적이다. 8090년대 음악, 그것도 ‘디스코’를 빵빵 틀어준다. 화성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신나는 음악 장르 중 하나인 디스코라니. 공상과학, 그것도 재난영화를 보면서 어깨를 들썩거릴 줄은 상상 할 수 없었다.

 


 마션은 ‘과학’이다. 필자는 인터스텔라 리뷰에서도 밝혔지만 문과다. 과학에 문외한이다. 당연히 마션에 나오는 모든 과학적 용어나 과학 이론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마크 위트니 구출을 위해 과학을 도입하고, 과학으로 해결하고, 과학으로 하나 되는 모습은 필자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마션은 ‘인류애’다. ‘인류애’가 마션이 우리에게 전하고픈 핵심적인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영화를 뒤집어 생각해보겠다. 마션은 재난 영화다. 죽은 사람들이 여럿 발생하는 장르다. 또한 배신이나, 강도, 살인 등 비 인간적 행위들이 많이 발생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션은 달랐다. 죽은 사람들이 한 명도 없을뿐더러 비인간적 행위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션은 공상과학 영화다. 공상과학 영화는 말 그대로 과학이 중점이 된다. 그렇기에 당연히 과학을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장애물이 등장한다. 이 또한 마션은 달랐다. 물론 중반에 보급선 발사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류애’ 구현이라는 전 세계의 목표 아래에서 장애물은 진정한 장애물이 아니었다. 중국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과학을 구현하는데 드는 비용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션을 인류애의 영화라 생각한 결정적 장면이 있었다. 다수의 미니멈한 고통이냐 소수의 맥시멈한 고통이냐. 즉 마크 위트니를 구하러 갈 것인가 아닐 것 인가 하는 문제였다. 무엇이 더 좋다 말할 수 없는 윤리적 문제다. 마크 위트니를 의도치 않게 버리고 떠난 우주사들은 이것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은 만장일치로 마크 위트니를 구하러 화성으로 떠났다. 그리고 지구에 있는 관계자들 또한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지지했다. 발전해서, 마크 위트니를 구하는 과정을 전 세계 생중계롤 보도하여 인류애를 최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이 장면이 리들리 스캇이 의도한,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궁극적으로 말하고 픈 인류애가 아닐 까 싶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마션은 아이러니한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고, 더 환상적이다. 공상과학 영화, 재난 영화의 프레임을 깨버리고 새로운 주제, 장르를 제시했다. 그 결과 또한 성공적이었다. 이번 리뷰는 여럿 영화적 기술이나, 연기력, 캐스팅 등은 평가하지 않았다.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주제, 플롯 등에만 초점을 뒀다. 그만큼 마션이 필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군대에 있다 보니 사회에 있을 때 보다 영화를 늦게 접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을 훑어볼 수 있는 기회도 생기게 됐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보니 마션은 극과 극의 평가였다. 좋은 평가를 주지 않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화성판 캐스트 어웨이, 하지만 절박감과 감정이 다소 아쉽다.’

 

 하지만 ‘화성판 캐스트 어웨이’가 아닌 ‘낙천성과 과학이 빚어낸 인류애’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영화를 접하면 마션은 좀 더 다르게 보일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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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2016. 8. 28. 15:0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필자는 일본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일본영화들은 대부분이 너무나 단순하고 뻔뻔한 플롯들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중후반까지는 필자의 냉소적인 이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

 

 

 러닝타임 한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대략 20분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 화면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분명 영화자체는 매력적이었다. 장애인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조금은 유쾌하게 조금은 진지하게 조화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 또한 영화 곳곳에 나오는 대사들. 그리고 복선들. 이누도 잇신의 치밀한 연출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게 다였다. 그저 담백해 보이는 척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재개봉 할 정도의 가치는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마지막 10분이 이 모든 편견을 다 부셔버렸다. 동거하던 조제와의 담담하고, 덤덤한 이별.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만나는 전 여자친구.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버리는 울음. 이 장면들이 있기 전, 자신들도 자연스럽게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들 까지.

 


 필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집까지 지하철이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굳이 버스를 타 30분 넘게 가는 버릇이 있다. 그 시간 동안 바둑을 끝낸 갓세돌 마냥 영화를 복기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복기 전, 즉 영화를 보는 중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주제를 단지 표면적인 ‘장애인과의 특별한 사랑’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 모든 것이 집약되어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마지막 10분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흔하디흔한 ‘사랑의 변화’가 주제였다. 장애인과 정상인의 사랑이 아닌, 그저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담백한’ 영화였다.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 변화한다.' 츠네오와 조제 또한 서로 사랑을 하며 변화했다. 필자는 이 변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조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랑을 하기 전, 조제는 자신을 숨기기 일쑤였다. 유모차에 자신을 은폐엄폐하고, 집 안에서도 조그만 옷장에 자신을 숨겼다. 하지만 츠네오와 만나고 사랑을 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호랑이와의 만남'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남자가 안 생기면 호랑이는 평생 못봐도 상관없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

 

 

 좋아하는 남자, 즉 사랑을 통해 장애라는 허물을 벗고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조제의 변화는 호랑이를 통해 빚어지는 외면의 변화 뿐 만이 아니다. 츠네오와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을 시간 1년. 1년 후의 여행에서, 물고기가 함께하는 여관방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사랑을 하기 전, 조제는 해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답답하고 고독한 공간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츠네오와의 1년이라는 사랑의 시간을 거치며 그녀는 내면에서 질곡의 변화를 느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혹여나 사랑을 찾게 된다면 다시 한 번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은 역시 마지막 10분! 조제는 1년 전과는 다르게 아무렇지 않게 전동 휠체어로 세상을 누비며, 정리한 집에서 일상을 맞이하고, 또 다시 의자에서 다이빙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를 보면서 느낀 점. 감독의 역량이 이렇게 두드러진 영화가 또 있을까? 그리고 ‘장애’라는 다소 자극적인 수단으로 ‘사랑’이라는 담백한 목적을 이루는 이토록 역설적인 영화가 또 있을까? 재개봉 할 가치가 있는,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만드는,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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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2016. 8. 27. 18:59

서울역

 

- 연상호


 

 <부산행>은 연상호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좀비물과 KTX라는 신선한 조합으로 국내 영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그럼에도 <부산행>에선 몇몇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회 비판적 메시지의 결여였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들은 영화 곳곳에 존재하였으나 그 내용은 선명하지 못했다. 사회비판적 작품을 만드는 데 도가 튼 연상호 감독이기에 아쉬움은 더욱 진하게 남았다. 하지만 이 아쉬움은 곧 기대로 변했다. <부산행>의 프리퀄,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이란 장르에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감독이었다. <돼지의 꿈>, <사이비> 등에서 이를 입증한 바 있다. 그렇기에 <서울역>에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연상호 감독은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기대를 상회하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서울역>에서 연상호 감독은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이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희망 또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냉혹함, 인간의 적은 인간뿐이라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적나라하게 노골적으로 담아냈다.

 

 

 <서울역>은 표면상으론 좀비 애니메이션이다. 서울역 한 노숙자로부터 시작된 의문의 좀비화가 그 근방까지 퍼지는 과정, 그와 함께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 작품이다. 즉 좀비와 좀비화를 피하기 위한 인간의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이면적으론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를 녹여낸 애니메이션이었다. <서울역>은 좀비와 인간의 대결구도를 표현한 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과의 대결,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빚어낸 사회와의 대결구도를 표현한 애니메이션이었다. 이러한 의도는 보편적 복지의 실현을 주장하는 사람이 피를 흘리며 절뚝이는 사람을 도우려 하지만 그가 노숙자임을 알아차리고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첫 씬부터 드러난다.

 

 

 <서울역>에서 좀비는 그저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욕망을 일깨우는 수단에 불과했다. 인간은 좀비들이 점령한 세상에서 생존 혹은 다른 목표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인간은 이성이 아닌 감성만을 좇게 되고 사회는 질서가 아닌 무질서로 변모했다. 그 결과 인간의 적은 좀비가 아닌 인간이 됐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에 숨어서 물대포를 쏘아대는 경찰 및 군인, 그 속에서도 합심하기는커녕 각자의 생존에만 몰두하는 인간, 자신의 물욕과 욕정을 위해 좀비 떼를 무릅쓰고 혜선을 끝까지 추적하는 석규까지. 인간의 적은 좀비가 아닌 인간이라는 절망을, 인간이 빚어낸 사회에선 감성 젖은 희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좌절을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물론 <서울역>에서도 아쉬운 점은 여럿 있었다. 전문 성우를 쓰지 않은 탓에 어색하게 느껴진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 너무나도 수동적인 여주인공 ‘혜선’,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 탓에 <부산행>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재미 등등.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자신만의 뚝심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서울역>이라는 극한의 사회 비판적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생생히 그려지는 무시무시한 작품,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이었다.

 

 

ps1. 마지막 반전은 인간과 인간의 대결구도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서울역> 최고의 씬이었다. 그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ps2. <서울역>이 잊히지 않는 이유, 연상호 감독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자의 그것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헬조선’과 그대로 조응하기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8. 25. 18:44

부산행


- 연상호

 

 

 필자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선호하지 않는다. 실사 영화와 달리, 지극히 유희에 중점을 둔 장르라 여겼다. 영화라는 매체가 전달해야 할 궁극적인 메시지를 내포하지 못한 장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고정관념을 부셔준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사이비>였다. 영화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맹목적 믿음의 폐해를 그린 애니메이션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소재라 큰 기대를 안 하고 봤었다. 하지만 사이비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이를 표현하는 탄탄한 연출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네 사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사회 비판적’ 애니메이션이었다. 이것이 연상호 감독과 필자의 첫 만남이었다.

 

 

 작년 여름 즈음에, 우리나라 첫 좀비 영화가 크랭크인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또한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좀비물이라 쓰고 억지 감동이라 읽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오류를 범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독이 연상호라는 점에서 일말의 기대감을 품게 됐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아닌 실사 영화. 그리고 좀비물이라는 새로운 시도. 연상호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풀어낼지 호기심을 갖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산행>은 Well-Made 영화였다. <부산행>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단연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압도적인 에너지였다. 부산행 KTX라는 좁고, 긴 공간에서 펼쳐지는 좀비와의 사투는 관객들의 긴장을 끊임없이 유도했다. 실제로 필자는 특수한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릴에 취해 영화 중반부까지 시계 한 번 보지 않고 영화에 몰입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좀비들도 영화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보통의 장편 영화들은 완급조절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하강의 시퀀스를 삽입했다. 하지만 <부산행>은 달랐다. 중반부까지 계속적인 좀비의 등장을 통해 상승의 분위기를 유지했고, 영화의 서스펜스를 극대화했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위하는 연상호 감독의 효율적인 연출도 훌륭했다. <부산행>은 극의 진행에 필수적인 인물들로만 플롯을 구상했다. 이들의 과거 또한 일절 다루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부산행 KTX 이외의 지역에 대한 정보는 최소화했다. 관객의 포커스를 오로지 부산행 KTX에만 맞춘 연출을 선보였다. 근래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경제적인 연출이었다.

 


 하지만 중반부까지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탓일까? 후반부까지 이 에너지를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부산행>의 가장 큰 아쉬운 점이었다. 중반부까지 극의 전개는 부산행 KTX처럼 빠르고 탄탄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평면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개 속도는 급격이 다운됐다. 전개 방향마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다소 억지스러운 씬들이 난무하게 됐다. <부산행>의 뜨거운 감자, 신파 시퀀스 또한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신파 시퀀스는 <부산행>같은 영화를 위해선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부산행>에선 ‘딸’이라는 가족이 KTX에 함께 했다. 가족이 결합된 이상 신파 시퀀스는 영화에서 필연적으로 언급되어야 할 내용이었다. 연상호 감독은 신파 시퀀스에 대한 우려를 의식한 듯, 기존 영화들이 답습하던 오버랩과 플래시백의 남용을 최소화하여 신파의 비중을 줄이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산행 또한 과도한 신파극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신파 시퀀스의 전체적인 활용이 문제였다. 분명 단 하나의 플래시백을 활용해 신파 시퀀스를 구성한 것은 색다른 시도였다. 하지만 이 플래시백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체감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시퀀스 전체의 내용도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BGM도 아쉬웠다. 조악한 감상 조장을 위한 시도는 불완전한 신파를 초래했고 이는 과도한 신파라는 지적으로 직결됐다. 또한 그간 연상호 감독이 자랑하던 사회 비판적 모습은 이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국가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사용한 씬들은 받아들이기 어색할 정도로 인위적이었다. 좀비로 인해 싹튼 인간과 인간간의 윤리적 대립도 큰 공감을 이끌어내기 부족했다. 과정 없이 결과만 툭 던져놓은 듯한, 단편적인 모습이었다. ‘사회비판적’이라는 연상호 감독 본인만의 성격에 지나치게 집착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그래도 <부산행>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한 이유, 역시 특유의 폭발적 에너지였다. <부산행>만의 넘치는 에너지는 필자가 지적한 아쉬운 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멋진 동력이었다. 좀비물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연출도 보기 좋았다. 국내에서도 이 정도의 높은 퀼리티 좀비물을 제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몸소 증명한 작품이었다.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매력으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연상호 감독의 첫 실사영화, <부산행>이었다.




PS. 하지만 <부산행>의 프리퀄, <서울역>이 더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PS 2. 안소희 연기는.. 발연기임은 분명했지만 좀비 연기에서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볼 만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베스트 연기자는 단연 '마동석'. 좀비인지 인간인지 분간이 안 되는 대체할 수 없는 그만의 캐릭터!

Posted by AC_CliFe
Movie2016. 8. 25. 18:34

터널

 


 <터널>이 관객들을 사로잡는 이유재난영화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기존 재난영화는 그저 신파그저 드라마몇 가지 공통된 공식을 고이 따라가는 형식을 지녔다.그래서인지 누구나 예상할 수 있고뻔한 결말로 이어졌다특히 국내영화는그러나 <터널>은 달랐다. ‘하정우라는 배우를 앞세워서 한국의 <마션>을 꿈꾼색다른 재난영화였다.

 

 

 <터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션>의 그것과 같이 유쾌하고 낙천적이다. <터널>에 갇힌 부정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타계하려 한다시종일관 우리를 웃음 짓게 하는 하정우의 드립들그를 뒷받쳐주는 오달수와 여러 조연들의 지원사격까지주인공이 과연 터널에 갇힌 상황이 맞는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낙천성’ 이었다그리고 관객들을 속 시원하게 만드는 직설적인 풍자까지파란지붕에 거주하시는 한 여성분이 보면 마치 자기를 보는 듯 해서 얼굴을 붉힐 것 같은 맛깔 나는 풍자였다.

 


 하지만 위에 나열한 장점들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킨 안타까운 <터널>이기도 했다지루함과 늘어짐이 극한을 찍은 나머지 10분마다 한 번 씩 휴대폰을 끄적였을 정도풍자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영화적 개연성은 너무나도 허술하고 빈틈이 많았다터널에서의 시간은 순식간에 스킵된다단지 ㅇㅇ일 후 라는 무책임한 자막과 함께후반부의 대부분 시퀀스는 과장으로 뒤덮였다감동과 극적인 서스펜스로 연결되어야 할 과장이 오버와 억지로 보일 정도였다아무리 영화라지만그렇기에 하정우라는 배우가 마치 <더 테러 라이브>에서의 본인처럼너무나도 짊어질 짐이 많은 영화였다.

 

 

 <끝까지 간다>라는 걸작으로 충무로에 이름을 알린 감독 김성훈김성훈이라는 감독의 이름값에 큰 기대를 했던 탓일까세월호란 강한 링크를 가진 주제를 가지고 이런 영화를 만들다니다음에는 평소의 본인만의 우직한 스타일을 그대로 가지고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