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2018. 3. 12. 19:53

개인주의를 위한 자기고백

 

 대한민국 집단주의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기적에는 희생이 뒤따른다이 희생은 동일하게 집단주의였다집단주의는 우리 사회의 악으로 자리잡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이런 기세에 반발하여 등장한 게 개인주의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은 조금씩급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개인주의의 유행을 이해하지 못했다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믿었고 그래서 누구나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했다그 위에 쌓아진 실현 욕구의 차이가 개인주의자를 가른다고 여겼다필자는 개인주의의 실현 욕구가 강했다집단에 매몰되기 싫었다그래서 대학이 좋았다내가 무엇을 하든 지 신경 안 썼기에그래서 아싸가 좋았다인간관계를 신경 쓸 시간에 일을 하고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개인주의자를 꿈꾸며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넘어 조소를 보냈다그러다 문유석 부장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봤고 나를 돌이켜보는 기회를 얻었다.

 

(중략)

 

 결과론적으로 필자는 집단주의자였다아니우리 모두 집단주의자였다성악설에 근거한 본성은 대한민국 집단주의 환경에 거세되었다사실 개인주의자를 표방한 나는 그 누구보다 집단에 잘 적응했다어린 나이부터 해온 사회생활의 경험이 행동에서 묻어났다고 해야 할까집단과 집단 간의 선호도가 나를 개인주의자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중략)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그렇기에 관계를 빚어가며 살아간다하지만 관계는 집단이었다한 집단이 싫어서 개인주의를 선언하고 그 집단을 나온다그러면 다른 집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집단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이고 나였다.

 

(후략)

 

ps. 문유석 부장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접한 적이 있어서 칼럼의 글감으로 정했고 글을 썼습니다글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문유석 판사가 혐오하는 냉소의 느낌이 짙습니다결론도 냉소로 끝냈습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집단주의는 대물림 속에서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문유석 판사는 대화와 토론을 강조했지만 대화와 토론도 집단 속에서 이뤄지고 그 결과 집단주의로 귀속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네요이 글을 쓰면서 자괴감도 들었습니다이런 글 쓰는 놈이 언론계에 있고메이저 언론인을 지망한다는 거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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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C_CliFe
Book2017. 6. 7. 17:58

21번째 뒷담화, 조기숙 교수의 <왕따의 정치학> 입니다!


최근 급격한 논조의 변화로 진보 대통령 문재인을


공격하는 진보 언론 한경오.


이 상황을 '왕따'라고 표현하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지 분석한 조기숙 교수의 책입니다.


언론과 정부, 프레임과 대통령, 노무현과 문재인.


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오늘도 북끄북끄와 함께해주세요~~



http://www.podbbang.com/ch/13007

Posted by AC_CliFe
Non Culture Life2017. 4. 19. 15:44

그동안 몰랐었던 4.19 혁명에 대한 진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군대 후임이다. “! 나 휴가 나왔어! 지금 형 학교 후문인데 형 안 바쁘면 얼굴 한 번 보자!” 바람도 쐴 겸 도서관에서 나와 후문으로 향했다. 맞후임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학교 캠퍼스를 거닐었다. 잔디 광장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때 맞후임이 도서관 앞에 설치된 4.19 혁명 관련 조형물을 보고 말했다. “, 4.19가 무슨 날인지 알아?” 이게 날 역사도 모르는 파렴치한 놈으로 보나. “4.19 혁명, 이승만 하야시킨 혁명이 발생한 날이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황당했다. “그거 말고, 4.19 내 제대일이잖아!” 이렇게 농을 주고받다가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 하는데 4.19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4.19, 4.19.. 4.19 혁명은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는 군인이셨다. 대령까지 진급하셨다. 할아버지 집에 놀러갈 때 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라고.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라고. 할아버지를 잘 따르던 나는 뭣도 모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군대 무용담을 즐겼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는 이승만을 칭송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을 거라고. 그가 저지른 부정들은 당시 상황에선 최선의 선택이었다며 그를 변호했다. 역사에 무지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할아버지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사회탐구 과목으로 근현대사를 선택한 나. 하루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대해서 배웠다. 배우다 보니 이상했다. 내가 알고 있던 이승만이랑은 전혀 달랐다. 당시의 부정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다. 이승만의 행동은 독재의 기반을 위한 욕망에 치우친 행동이었다. 더 충격을 받았던 사실은, 4.19 혁명은 기존의 혁명들과 달리 나와 같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1960, 411.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서울 지역 총학생회는 이 사실을 알고 419일 오전 9시에 경무대와 중앙청에 집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운명의 419일 아침. 경무대 앞에선 대학생만 2만명이 모였다. ··· 이러한 노력은 대통령 하야라는 성과로 직결됐다.’ 당시 내가 공부했던 ppt 자료였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이승만의 만행을 막은 주체가 대한민국의 학생들이었다니.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우리나라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의 꽃을 만개시켰다니. 그동안 4.19혁명에 대한 거짓된 진실을 알았던 탓이었을까. 이때의 느낌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이달 말에 4.19혁명의 주인공들이 자고 있는 국립4.19민주묘지를 가기로 했다. 4.19 혁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 내 맞후임과 함께. 그리고 사과할 것이다. 그동안 진실을 마주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 달라고. 그리고 감사를 전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줘서 고맙다고



Posted by AC_CliFe
Book2016. 11. 26. 20:39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소설가) 저



 

 이 책의 제목처럼 오늘날은 ‘뉴스의 시대’다. 사회에 뉴스의 양 자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뉴스 자체의 질에 대해서도 관심이 증폭됐다. 이 뉴스는 어떤 성향을 띠고 있는지, 어떤 논조로 기사를 작성하는지, 어 떤 소식을 주로 다루는 지 등에 대한 관심이다. 이는 곧 대중들의 뉴스에 대한 맹목적 수용이 아닌 선별적 수용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도 뉴스에 대한 선별적 수용을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자신만의 지침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뉴스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라, 추측으로 점철된 기자의 관점을 조심해라 등 기존의 관련 책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지침들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책을 조금 더 정독하며 살펴보니 알랭 드 보통은 뉴스가 갖춰야 할 성격 ‘한 가지’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한 가지는 뉴스가 다루는 주제에 대한 ‘맥락’이었다.


 

 정치뉴스 中 사건이 전개되어 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은 것.


 해외뉴스 中 우리가 특정지역에서 일상적으로 통하는 게 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한다면 비일상적 상태를 측정하거나 그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


 경제뉴스 中 비즈니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은 오로지 경제 용어로만 작성하거나, 회사 전 체를 +1.20 이라고 요약하거나 하는 행위들은 한계가 명확한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맥락’에 대한 지적은 일견 공감이 됐다. 오늘날의 뉴스 구조를 살펴보면, 사건의 결과에 많은 비중이 쏠려있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나 원인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거나 극소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뉴스의 불친절은 뉴스의 수용자, 대중들이 사건에 대한 본질을 알지 못하게 하고, 사건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맥락’. 뉴스를 소비 및 수용하는 대중들의 입장에선 중요한 게 맞다. 그들 또한 뉴스의 본질, 그리고 깊은 이해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스에 맥락을 담아낸다는 관점은 안타깝게도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뉴스라는 매체도 결국 ‘돈’이라는 상업적 요인과 결부되어있기 때문이다.

 


 뉴스를 제작하는 여러 기업들은 다수의 고객들을 유치하길 원한다. 그로인한 다량의 광고가 많이 붙기를 원한다. 그들도 이윤추구를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고객, 다량의 광고를 위해선 어찌해야겠는가? 자신들이 제작하는 뉴스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이끌어 낼 뉴스를 제작해야 한다.

이런 뉴스는 알랭 드 보통이 생각하는 맥락화된 뉴스가 아닌, 결과만 간단하게 압축한 뉴스다. 실제로 어떤 사건의 결과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뉴스가 사건의 배경, 원인까지 설명한, 즉 맥락화된 뉴스보다 더 높은 트래픽을 기록하고 더 많은 가입자를 이끌었다. 이런 사실을 안 기업들은 너도나도, 당연하게도, ‘결과’만을 위한 뉴스를 제작,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적인 누스의 선별적 수용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두 종류의 뉴스 읽기를 추천한다. 뉴스는 각 회사의 특성에 따라 다른 논조를 띠기 마련이다. 상반되는 논조를 지닌 두 뉴스를 선택해 그 사이에 존립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는 것 이다. 맥락화된 뉴스가 불가능한 오늘날에, 두 종류의 뉴스 읽기는 대중들의 정보 선별적 수용을 위한 차선책으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할 것 이다.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