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2016. 10. 22. 18:08

끌림

 


이병률


 

  군대의 도서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더구나 필자 부대의 도서관은 단출한 컨테이너.. 책을 보기 위해 아쉬운 대로 컨테이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생각보다 볼만한 책이 많았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눈에 띈 책 ‘끌림’. 과거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한 번 접했던 책이었다. 그때의 추억에 빠져볼까 싶어 다시 읽기로 결정했다.

 

 

 ‘끌림’ 여행에 수많은 끌림을 느끼는 작가 이병률이 쓴 책이다. 여행? 기행문? ‘뻔한 전개를 가지고 있겠지.. ’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끌림은 달랐다.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랄까? 비스 무리한 기법으로 책이 쓰였다. 여행 중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평소 자신이 살면서 느낀 바를 이야기하고 타국 여행자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여타 기행문과 달리 이야기 주제의 폭이 넓다.

 


 주제의 폭이 넓은 기행문. 꽤나 신선했다. 이로 인해 필자는 진기한 간접체험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장르인 기행문이지만, 주제의 다양성 때문에 책에 붙은 흥미를 안 떼고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단점 또한 존재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기행문 특성이기도 하지만, 끌림은 이 단점이 두드러졌다.

 


 작가의 평소 가치관 및 세계관을 알 수 있었다. 여행 중 담백한 담화와 에피소드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횡설수설했다. 끌림에 대한 간단한 평가다.

 


 이제 이병률 작가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사실 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이병률 작가의 삶 이었다. 서평에서 작가 신경숙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돌아오자마자 떠날 준비를 하는 병률’

 


 여행이 삶인 병률이다. 흔히 일컬어지는 갓수저인가? 부러운 삶이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서 만난 짧고도 돌이킬 수 없는 인연들을 만난점도 부러웠다. 여행으로 인해 얻어진 그의 소중한 자산들, 그리고 경험들 그 자체 모두가 부러웠다.

 


 병률의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끌림에서 나타나는 병률은 본능적이다. 그리고 풍부하다. 그래서 알 수 없다. 병률은 정말 다양한 국가를 갔다 왔다. 각 나라에서 느낀 그의 감정은 풍부했다. 그 예가 병률이 느낀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각 나라마다 달랐다. 어쩔 때는 간절함의 존재, 어쩔 때는 허탈함의 존재였다. 그래서 병률의 글이 횡설수설하고 정제되지 않았나 보다. 병률만의 감성과 몰입이 짙게 배였기에 나타난 결과물인 듯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끌림은 기행문이다. 다른 책 들 보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병률의 사진들을 보며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을 어루만졌고 병률의 생각을 읽으며 여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웠다. 전에 독서토론 동아리에서 접했을 때 보다 더 크게 와 닿았다. 군대라는 환경 때문인가..? 어찌됐든 책은 한 번 읽어서는 안 되는 것 이라는 걸 재확인 했다.

Posted by AC_CliFe
Book2016. 10. 2. 19:42

<쓺 : 문학의 이름으로>


 

- 문학실험실

 

 

 문학에는 모순적인 매력이 있다. 현실을 토대로 만든 것이 문학이다. 하지만 현실과는 또 다른 층위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문학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랑했다. 문학에는 순수한 매력도 있다. 그저 작가의 상상력에만 기대어 창작되는 것이 문학이다. 그래서 문학을 사랑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사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이었다.

 


 필자는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그 사실 자체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과거 본인이 접했던 작품을 무의식적으로 흘려 쓰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문학에 대한 필자의 사랑도 견고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표절사건 이후의 사태를 보고 필자는 문학에게 좌절했다.

 

 

 신경숙은 솔직하지 못했다. 각종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했다. 비단 신경숙 뿐만이 아니었다. 이 사건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출판사 또한 침묵을 지켰다. 문학에 종사하는 작가들도 그 어떤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 침묵도 오래가지 못했다. 순수함으로 대변되는 문학에서도 모종의 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작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종의 자본들과 결탁했다. 일명 문학자본이다. 그 과정에서 문학 권력을 창조했다. 문단 권력을 창조했다. 우리를 위한 문학이 아닌 그들을 위한 문학이 됐다. 필자는 문학에게 좌절했다.

 

 

 필자는 어리석었다. 문학의 異常(이상)을 감지하지 못한 필자의 불찰이었다. 이미 문학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학에선 과거의 순수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극적인 활자가 난립했다. 변혁을 두려워하는 퇴행적 행보를 보였다. 문학상업주의에 굴복한 모습이었다. 필자는 또 한 번 문학에게 좌절했다.

 

 

 그 때 ‘문학실험실’이란 단체를 알게 됐다. 그들이 제작하는 문학전문지 <쓺 : 문학의 이름으로>를 읽게 됐다. 그저 좋았다. 기존 문학이 저지를 과오를 성찰하고 한국 문학의 존재이유를 추구해나간다는 그들의 자세가 그저 좋았다. 결심했다. 필자도 그들의 행보에 관심을 주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정기 후원을 하기로. 그럼으로써 미약하게나마 태동하는 한국 문학의 본질을 믿어보기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문학, 한국 문학을 사랑하기로.

Posted by AC_C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