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를 위한 자기고백
대한민국 집단주의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기적에는 희생이 뒤따른다. 이 희생은 동일하게 집단주의였다. 집단주의는 우리 사회의 악으로 자리잡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런 기세에 반발하여 등장한 게 ‘개인주의’다.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은 조금씩, 급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개인주의의 유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믿었고 그래서 누구나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 위에 쌓아진 실현 욕구의 차이가 개인주의자를 가른다고 여겼다. 필자는 개인주의의 실현 욕구가 강했다. 집단에 매몰되기 싫었다. 그래서 대학이 좋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지 신경 안 썼기에. 그래서 아싸가 좋았다. 인간관계를 신경 쓸 시간에 일을 하고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개인주의자를 꿈꾸며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넘어 조소를 보냈다. 그러다 문유석 부장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봤고 나를 돌이켜보는 기회를 얻었다.
(중략)
결과론적으로 필자는 ‘집단주의자’였다. 아니, 우리 모두 집단주의자였다. 성악설에 근거한 본성은 대한민국 집단주의 환경에 거세되었다. 사실 개인주의자를 표방한 나는 그 누구보다 집단에 잘 적응했다. 어린 나이부터 해온 사회생활의 경험이 행동에서 묻어났다고 해야 할까. 집단과 집단 간의 선호도가 나를 개인주의자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중략)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관계를 빚어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관계는 집단이었다. 한 집단이 싫어서 개인주의를 선언하고 그 집단을 나온다. 그러면 다른 집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집단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이고 나였다.
(후략)
ps. 문유석 부장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접한 적이 있어서 칼럼의 글감으로 정했고 글을 썼습니다. 글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문유석 판사가 혐오하는 냉소의 느낌이 짙습니다. 결론도 냉소로 끝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단주의는 대물림 속에서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유석 판사는 대화와 토론을 강조했지만 대화와 토론도 집단 속에서 이뤄지고 그 결과 집단주의로 귀속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네요. 이 글을 쓰면서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이런 글 쓰는 놈이 언론계에 있고, 메이저 언론인을 지망한다는 거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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