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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16. 11. 1. 20:45

미움받을 용기



고가 후미타케(작가), 기시미 이치로(작가) 저  

 

 

장면 1. 필자가 근무 중 한 병사가 책을 들고 휴가에서 복귀했다. 무슨 책이냐고 물어봤다. ‘미움 받을 용기’ 이었다. 자기개발서인데 꽤 재미있다고 했다.


 

장면 2. 휴가를 나갔을 때, 늘 그렇듯 서점을 갔다. 서점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위치한 Best seller 코너. 둘러봤다. 여기서도 ‘미움 받을 용기’가 있었다.


 

장면 3. 복귀 후, 컨테이너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서 직함을 갖고 있는 필자. 반납 처리할 책이 있나 봤다. 정리하다 익숙한 표지의 책이 눈에 밟혔다. 그 책 역시 ‘미움 받을 용기’였다.

 

 

 사실 필자는 자기 개발류의 도서를 안 읽는다. 비논리적,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책도 안 읽으려 했다. 그런데 위의 장면들이 마음에 걸렸다. ‘미움 받을 용기’와 인연이 있는 건가 싶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자마자 결정했다. 누가 빌려가기 전에 ‘미움 받을 용기’의 대출처리를 했다. 혹여나 언급한 자기개발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은 채.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나’ 이었다.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었다. 이런 단점들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자기개발서와 차별화를 두려고 한 요소들이 몇몇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자기개발서가 범한 오류들을 그대로 답습한 모습이었다. 왜 몇 달간 Best Seller 코너에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우선 이 책은 구조의 차별성을 택했다. 여타 도서들은 단순한 서술 구조를 택한다. 그러나 이 책은 대화 구조를 택했다. 이 구조는 가시적으로 큰 효과를 거뒀다. 일방적인 강의 구조가 아닌 쌍방적인 대화 구조를 책에 구현함으로써 독자들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줬다. 대화 구조만의 신선함도 그들의 집중을 환기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책의 내용도 쉽게 이해하는 듯한 효과도 준다. 이 책에선 ‘청년’이 독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해, 독들의 궁금증을 직접적으로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대화구조는 가시적으로‘만’ 효과를 거두었다. 대화 구조의 이면에는 맹점이 존재한다. 바로 ‘답정너’다. 응? 글의 구조에서 뜬금없이 ‘답정너’(답은 정해져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미움 받을 용기’의 대화에서 질문하는 쪽은 주로 ‘청년’이다. 대답하는 쪽은 ‘철학자’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청년이 독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독자들이 품을 법한 궁금점을 철학자에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눈속임’에 불과하다. 독자의 대변인인 듯 보이나, 결국 작가의 펜 끝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에 불과하다. 즉, 청년은 독자의 대변인이 아닌, 작가의 대변인 역할을 한 것 이다. 철학자는 작가의, 구체적으로는 아들러의 생각을 말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작가의 역할. 결론은 ‘미움 받을 용기’의 대화구조는 작가가 질문하고, 작가가 대답하는 어설픈 답정너 형식을 띠고 있다. 결국 이 대화는 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고, 독자는 이에 휩쓸리게 되는 것 이다. 교묘한 눈속임으로 독자의 거짓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다.

 

 

 ‘미움 받을 용기’는 내용에서도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들러’의 심리학을 차용한 것 이다. 필자 또한 ‘아들러' 란 사람의 이름만 들어봤을 뿐,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따로 접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새로운 무언가를 던져주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책을 읽어보니, 아들러의 심리학이라는 것도 새로운 특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개발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더 극단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공감은 덜 되고 아쉬움만 더 늘어났다.

 


 아들러는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전에 하나의 전제를 깔아둔다.

 

 ‘사회가 있기에 개인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사회가 있기에 개인이 있는 것이다. 즉 사회 속의 개인을 인정하는 것 이다. 아들러는 이 전제에서 출발해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제와 결론이 서로를 부정하는 사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회 속엔 타인이라는 개인, ‘나’라는 개인이 공존한다. 타인들과 ‘나’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되고, 이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게 사회다. 이런 사회를 인정한 아들러인데, 아들러는 결론으로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라 한다.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고민들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움 받을 용기’에서 마음을 주는 주체는 ‘나’와 사회를 같이 구성하는 타인들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타인에게 ‘미움 받을 용기’를 내어 ‘나’자신을 행복하게 하라? 다른 사회구성원, 타인과의 부조화로 사회유지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아들러의 ‘미움 받을 용기’가 아닌가? 사회속의 개인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사회 해체까지 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내면서 살아가라? 그렇기에 ‘미움 받을 용기’는 비논리적이다.

 


 좋다. ‘미움 받을 용기’를 추구하며 살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아들러에 의하면 타인들에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고민들은 다 해결됐을 것 이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든다. 과연 행복해질까? 아들러는 행복해진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미움 받을 용기’를 실천해서 오는 행복의 정도보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마음으로 인한 고립의 두려움, 외로움의 정도가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움 받을 용기’는 비현실적이다.


 

 사실 필자는 자기개발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뿐, 그것의 존재가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자기개발서를 읽고 기쁨이나 힘을 얻는다면 자기개발서는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Best seller인 ‘미움 받을 용기’는 자신의 역할 수행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기쁨과 힘을 얻어야 할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 이다. 문득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필자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그리고 여럿 우리들이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AC_CliFe